이순철이 기억하는 김태업…고교야구 선동열 라이벌 김태업 영면
2023년 03월 15일(수) 18:45 가가
“중학생 최초로 무등경기장 홈런
투타 모두 능한 놀라운 선수였다”
오랜 투병에 뒤늦게 타계 알려져
투타 모두 능한 놀라운 선수였다”
오랜 투병에 뒤늦게 타계 알려져
1978∼1980년 고교야구 최고의 에이스로 이름을 날린 김태업(金太業) 전 강진 북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이 영면했다.
지병으로 투병해왔던 고인이 지난달 13일 조선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지난 14일 유족이 전했다. 향년 60세. 고인은 수년 동안 투병하느라 외부활동이 줄면서 뒤늦게 영결소식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1962년 2월19일 강진에서 태어난 고인은 강진 북국민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했고, 5학년 때 광주 서림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이어 전남중·광주상고(1학년 때는 전남고), 연세대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이순철 SBS해설위원과는 초·중·고·대에서 함께 야구를 했다.
고인은 고등학교 내내 팀의 에이스로 활약을 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광주일고의 선동열·차동철과 함께 투수 3인방으로 꼽혔던 그는 키 185㎝의 건장한 체격을 바탕으로 투·타에서 모두 팀을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했다.
고인이 3학년이었던 1980년 5월 1일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는 광주상고와 광주일고의 눈길 끄는 맞대결이 펼쳐졌다.
예선에서는 광주상고가 광주일고를 꺾었지만 결승에서 2-8패를 기록했다. 광주일고가 차동철과 선동열을 번갈아 가며 마운드에 올렸지만, 김태업은 앞선 세 경기에서 완투를 하면서 결승전에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고인은 같은 해 8월 봉항기 대회에서는 3경기 연속 홈런을 터트리며 투·타에서 모두 특급 실력을 보여줬다.
1985년 선동열, 이순철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지만 그의 프로 생활을 짧았다. 입단 첫해 35경기에 나온 게 전부였다.
1986년 입대를 계기로 야구를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시작한 그는 2012년 모교인 강진 북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해 2013년 도지사기 학생야구대회 준우승, 2014년 도지사기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선수 김태업’을 지켜봤던 이순철 위원은 “놀라운 선수였다”고 기억했다.
이 위원은 “중학교 3학년 선수가 무등경기장에서 홈런을 친다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인데 중학생 최초로 홈런을 기록했었다. 투수 포지션에서도 선동열 보다 훨씬 앞서나갔다”며 “고등학생으로서는 투·타에서 완벽했다. 전남고를 다닐 때인데 당시 신일고 3학년에 김정수, 김남수, 양승호, 최홍석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있었다. 우승 후보였던 신일고를 상대로 1학년 김태업이 2-1 승리를 이끌었었다. 굉장한 유망주였다”고 그를 회상했다.
뜨거운 인기도 기억한다.
이 위원은 “여학생한테도 인기가 정말 많았다. 김태업을 보러 온 여학생 팬들 때문에 숙소에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학교에 팬레터도 엄청 왔다. 내가 프로에 있으면서 받은 편지보다 더 많은 편지를 받았을 것이다”며 “타이거즈 시절 김응용 감독한테도 총애를 받았다. 다른 동기들이 서운할 정도로 정말 총애를 했다. 그래서 나는 ‘키가 적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었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자극제가 됐다. 그렇게 실력과 인기를 갖췄던 선수가 더 활약하지 못하고 일찍 떠나서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김여울 기자 wool@kwangju.co.kr
지병으로 투병해왔던 고인이 지난달 13일 조선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지난 14일 유족이 전했다. 향년 60세. 고인은 수년 동안 투병하느라 외부활동이 줄면서 뒤늦게 영결소식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고등학교 내내 팀의 에이스로 활약을 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광주일고의 선동열·차동철과 함께 투수 3인방으로 꼽혔던 그는 키 185㎝의 건장한 체격을 바탕으로 투·타에서 모두 팀을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했다.
예선에서는 광주상고가 광주일고를 꺾었지만 결승에서 2-8패를 기록했다. 광주일고가 차동철과 선동열을 번갈아 가며 마운드에 올렸지만, 김태업은 앞선 세 경기에서 완투를 하면서 결승전에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85년 선동열, 이순철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지만 그의 프로 생활을 짧았다. 입단 첫해 35경기에 나온 게 전부였다.
1986년 입대를 계기로 야구를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시작한 그는 2012년 모교인 강진 북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해 2013년 도지사기 학생야구대회 준우승, 2014년 도지사기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선수 김태업’을 지켜봤던 이순철 위원은 “놀라운 선수였다”고 기억했다.
이 위원은 “중학교 3학년 선수가 무등경기장에서 홈런을 친다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인데 중학생 최초로 홈런을 기록했었다. 투수 포지션에서도 선동열 보다 훨씬 앞서나갔다”며 “고등학생으로서는 투·타에서 완벽했다. 전남고를 다닐 때인데 당시 신일고 3학년에 김정수, 김남수, 양승호, 최홍석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있었다. 우승 후보였던 신일고를 상대로 1학년 김태업이 2-1 승리를 이끌었었다. 굉장한 유망주였다”고 그를 회상했다.
뜨거운 인기도 기억한다.
이 위원은 “여학생한테도 인기가 정말 많았다. 김태업을 보러 온 여학생 팬들 때문에 숙소에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학교에 팬레터도 엄청 왔다. 내가 프로에 있으면서 받은 편지보다 더 많은 편지를 받았을 것이다”며 “타이거즈 시절 김응용 감독한테도 총애를 받았다. 다른 동기들이 서운할 정도로 정말 총애를 했다. 그래서 나는 ‘키가 적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었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자극제가 됐다. 그렇게 실력과 인기를 갖췄던 선수가 더 활약하지 못하고 일찍 떠나서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김여울 기자 wool@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