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겨울 이불 안에서 -안녕달 그림책 ‘겨울 이불’
2023년 01월 26일(목) 00:30 가가
설날이면 할아버지 손을 잡고 큰집 큰할아버지댁에 갔다. 오는 순서는 매번 달랐지만 모두 모이면 도대체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는 십수 명의 사람이 너른 마당이 있는 집에 모여 떡국을 먹고 전을 먹고 웅성거리고 수런거렸다. 이를 위해 누군가는 (주로 여성은) 먹을 걸 차리고 먹은 걸 치우는 노동을 반복해야 했다는 부조리한 사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리고 그때는 어린 나이가 아닌 사람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듯하다. 어쨌거나 모르는 거는 모르는 것으로 둬도 아직 괜찮을 나이여서 그랬는지 설날은 즐거웠다.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또래 친척들이 방 하나를 차지하고 큰집에 있는 이불이라는 이불은 다 꺼내 놓고 키득키득 놀았다. 이불을 높게 쌓아 거기에 뛰어들었다. 어쩌다 혼자일 때면, 이불 안에 파고들어 거기에 깃든 은은한 어둠을 빌려 아이다운 꿈도 꿨던 것 같다. 휴대전화도 게임기도 심지어 텔레비전도 없는 그 방에서 우리는 무엇이 그리 즐거웠을까. 이불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즐겁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안녕달 그림책 ‘겨울 이불’은 이불의 즐거움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책이다. 설날이니까 일로 큰집의 이불도 아마 겨울 이불이었을 테다. 겨울 이불은 요즘 파는 극세사 이불이니, 구스 이불이니 하는 치들과는 다를 테다. 할머니가 손바느질한 두꺼운 솜이불일 것이고, 그게 목화솜이면 더욱 좋을 테다. 그런 이불은 그림책에서 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들어서자마자 보인다. 방은 이미 발바닥이 뜨거울 정도로 데워져 있다. 윗목에는 귤과 귤껍질이 놓였고, 벽에는 아이가 더 어릴 때 그렸음 직한 낙서가 있다.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에 자주 왔던 것으로 보인다. 훌러덩훌러덩 겉옷을 벗고 스스럼없이 이불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온갖 것들을 만난다. 겨울 이불 안에는 바깥과는 다른, 특별한 세계가 있으니까. 그 특별한 세계는 나와 다른 것들에 경계와 혐오를 보이지 않고 그저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건네는 아이에게만 보인다. 그곳에는 곰과 너구리, 물개와 다람쥐, 개구리와 거북이 등등이 꼭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뜨거운 온돌 위에서 몸을 지지고 있다. 아니 그건 찜질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귀여운 동물들이 찜질방에 모여 있는 것이다.
겨울 이불 안에서의 상상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랫목 깊은 곳에 밥공기는 거대한 욕조가 되고, 곰에게 얻어온 식혜는 꽁꽁 언 호수가 된다.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이 만나고 가장 차가운 데와 가장 뜨스운 데가 닿는다. 다정한 그림체와 절묘한 의성어와 감탄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할아버지 손 잡고 설날 큰집에 먼저 도착해 다른 친척을 기다리던 과거의 나로 돌아간 것만 같다. 크리스마스 전날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무겁고 두꺼운 이불 안에 숨어 산타를 기다리던 밤이 떠오른다. 겨울 이불은 어떻게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불러내는 것이다. 거기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다면, 곰과 너구리와 다람쥐와 거북이가 함께 귤을 까먹는 장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거기에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다면.
이제 설날이 되어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두 분은 이제 세상에 없고, 나는 이불 안에 들어가면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그저 잠들거나, 내일의 걱정에 이리저리 뒤척일 뿐이다. 대신에 아이들은 우리 부부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설날이 되어서야 겨우 만난다. 부모님은 아파트에 살고, 아이들은 두꺼운 이불에 대해서 잘 모르는 듯하다. 그럼에도 아이는 이불 안에서 쫑알대는 걸 좋아한다. 옛집 같은 온돌은 아니지만, 이불 안에 밥공기는 없지만, 예전처럼 겨울이라고 귤만 먹는 건 아니지만, 아이에게는 내가 모르는 아이의 상상의 만들어진 세계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우리 어머니의 눈주름이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눈주름과 퍽 닮아 보인다. 이불 안에 들어가 소곤소곤 할머니를 불러 봐야겠다. 설날 즈음에 내리는 새하얀 함박눈이, 꼭 세상 모든 할머니의 대답 소리 같겠다. <시인>
이제 설날이 되어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두 분은 이제 세상에 없고, 나는 이불 안에 들어가면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그저 잠들거나, 내일의 걱정에 이리저리 뒤척일 뿐이다. 대신에 아이들은 우리 부부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설날이 되어서야 겨우 만난다. 부모님은 아파트에 살고, 아이들은 두꺼운 이불에 대해서 잘 모르는 듯하다. 그럼에도 아이는 이불 안에서 쫑알대는 걸 좋아한다. 옛집 같은 온돌은 아니지만, 이불 안에 밥공기는 없지만, 예전처럼 겨울이라고 귤만 먹는 건 아니지만, 아이에게는 내가 모르는 아이의 상상의 만들어진 세계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우리 어머니의 눈주름이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눈주름과 퍽 닮아 보인다. 이불 안에 들어가 소곤소곤 할머니를 불러 봐야겠다. 설날 즈음에 내리는 새하얀 함박눈이, 꼭 세상 모든 할머니의 대답 소리 같겠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