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사라진 저녁과 나타난 돼지
2022년 12월 29일(목) 01:00
-권정민 그림책 ‘사라진 저녁’
오늘도 배달 음식을 먹었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크림 파스타와 목살 스테이크였다. 매운맛이 살짝 감도는 필라프도 같이 시켰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음식이 현관 앞에 놓였다. 문만 빼꼼히 열고 오늘의 저녁을 식탁으로 들고와 비닐을 뜯고 플라스틱 용기를 열어 그것들을 먹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배달 기사에게 카드를 내밀고 받으며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수고하세요, 같은 말들도 주고받았는데 이제 그럴 일도 없다. 음식은 그게 무엇이든 약간 식은 상태로 현관 앞에 놓여 있다. 지구의 건강을 오랫동안 치명적으로 해칠 비닐봉지와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채로.

배달된 음식을 마주할 때마다 연원이 흐릿한 찜찜함에 시달린다.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소모된 것은 식재료와 약간의 돈뿐만 아닐 것이다. 자영업자와 배달 기사의 노동력과 조리와 운송을 위한 에너지, 그 둘을 연결해 주는 플랫폼 업체의 수수료가 음식을 구성한다. 요리는 생략한 덕분에 권장량보다 많은 염분을 섭취하게 될 것이며, 그것의 상당량은 조미료일 것이다. 설거지는 최소화되겠으나 음식을 포장하는 데 쓰인 플라스틱은 썩지 않고 살아남아 환경에 생채기를 낼 것이다. 찜찜함의 정체는 죄의식이었다. 하지만 게으름과 식욕 앞에 죄의식은 재빠르게 숨을 곳을 찾아 온데간데없다. 남은 것은 음식물 쓰레기와 과도한 포만감이 전부다. 그렇게 우리들의 저녁은 사라진다.

권정민 그림책 ‘사라진 저녁’에서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배달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저녁 식사는 허기를 달래고 영양분을 보충하는 본능적 행위임은 물론, 하루 내내 일상을 견디느라 고생한 사람에게 주는 안식이자 위안이어야 할 텐데도, 족발, 감자탕, 돈가스, 보쌈, 김치찌개를 주문한 그들의 표정에서는 일말의 기대감이나 평안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모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제 막 퇴근해서 양말만 벗어 놓은 채로, 마저 끝나지 않은 재택 근무를 하면서, 아기 띠에 아이를 안고서, 홈트레이닝을 하다 말고, 청소 중에 소파에 누워서…… 각각의 자세로 휴대전화에 골똘하다. 휴대전화에는 방금 배달시킨 저녁이 어느 정도 조리되었는지, 얼마만큼 왔는지, 다른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먹었는지, 그들이 남긴 리뷰에 사장님은 뭐라 답을 달았는지 담겨 있다.

그러나 돼지는, 그들이 주문한 음식의 주된 재료로 쓰이는 돼지의 존재는 휴대전화에 없었다. 어느 날 요리도 안 된 저녁거리-돼지 자체-가 아파트 앞으로 배달된다면 사람들은 뒷걸음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돼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돼지를 먹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돼지의 존재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배달된 저녁, 아니 돼지는 멀쩡하게 살아서 네 발로 움직이고 아파트 주민에게 눈길을 건네고 우는 소리도 낼 것이다(돼지는 우리 생각보다 빠르고 똑똑하고 깨끗하다고 한다). ‘사라진 저녁’의 주민들은 처음에는 돼지를 숨겼다가 결국에는 어떻게든 그것을 먹어 보기로 한다. 살아 있는 돼지를 요리하는 법은 간단하다. 씻는다 → 잡는다 → 나눈다 → 굽는다. 이 과정에서 준비물은 물론 인터넷으로 구매한다. 주문한 용품은 바로 다음 날 도착했다. 주민들은 과연 돼지를 잡아 파티를 열어 명실상부 ‘사라진 저녁’을 제대로 찾아올 수 있을까?

당장 모든 사람이 육식을 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신속하고 다양한 배달 음식은 필수적이고 고마운 시스템이기도 했다. 우리는 돼지 한 마리, 닭 한 마리 살지 않는 도시의 아파트에 살며 수많은 돼지와 닭을 먹는다. 우리는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갖가지 음식을 내 집 앞까지 오게 할 수 있다. 너무나 편리한 무언가는 그게 편리한 것인지조차 인지할 수 없게 만든다. 오로지 식용으로 사육되어 목숨을 내놓는 동물들이 있다. 오로지 한 번의 식사를 위해 만들어지고 곧 폐기되는 일회용품들이 있다. 그리고 오로지 맛있고 편리한 저녁 한 끼에 매몰되어 버린 사람들이 있다. 갑작스레 나타난 살아 있는 돼지는 그 사람들의 일상에 균열을 낸다. 우리는 그 균열을 모르는 척 살아가거나 임시방편으로 땜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균열의 밑바닥을 찬찬히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라진 저녁’은 그 바라봄에 도움을 준다. 저녁을 사라지게 하고, 돼지를 나타나게 하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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