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수필의 역사와 ‘수필의 날’- 오 덕 렬 한국창작수필문인협회 이사장
2022년 12월 06일(화) 00:15
최남선의 ‘가을’은 ‘청춘’지 11호(1917.11.16.)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수필이 창작적 진화를 거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창작 수필’의 효시이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의의보다도 작품성이 앞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왜, 유독 수필에서만 ‘창작, 창작’하고 ‘창작’을 말해 쌓는가? 잘 짚어 물었다. 시나 소설은 이미 창작으로 태어났으니 말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수필(에세이)은 태생이 비창작 일반 산문문학이면서도 서구의 창작론마저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여기의 문학’이니 ‘서자 문학’이니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말았다.

나는 위에서 ‘수필’(에세이)이라고 썼다. 에세이와 수필을 혼용하여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무엇에 관한 생각을 짓는, 즉 가치 창조의 문학이고, ‘창작 수필’은 마음을 짓는 문학이다. 이태준의 ‘심적 나체(裸體)’라는 말이나, 선배 작가들의 ‘심경 문학’이라는 말이나, 강범우 교수의 ‘마음이 앉을 자리’라는 표현들이 그것을 말한다. ‘에세이’라는 말은 ‘개벽’ 21호(1921)에서 처음 등장했다. 춘원 이광수는 ‘에세이’란 말을 정의하여 ‘문학적 논문’이란 말로 대체하였다. 칼라일, 에머슨 같은 이는 영문학에 유명한 논문 작가(Essayist)라고 했다. 그는 또 논문이라면 말이 적당치 아니하다며 영어로 ‘Essay’라 지칭하였다. 우리가 친숙하게 부르는 ‘수필’이란 장르 이름도 ‘영대’(1924)에서야 겨우 확정되었다. 그 전에는 수상, 수감, 단상(斷想) 등으로 불렸다. 나도향의 ‘그믐달’도 수필이 아니라 ‘단상’으로 발표되었던 것을 생각할 일이다.

창작이란 무엇인가? 제1 창조자는 조물주이고, 제2 창조자는 작가이다. 조물주는 만물-문학 용어로는 존재의 총계-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있게(exist, being) 하는 창조를 한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고,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사람, 동물, 새, 물고기, 풀 등 이 세상천지의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이다. 제2 창조자인 작가가 만드는 창조물은 창작품이다. 이것은 독자가 읽었을 때 머릿속에 상상으로만 형상(形象)이 떠오를 뿐이다.

창작 문학의 기본 작법은 ‘이것’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저것’이라는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처음의 ‘이것’이라는 소재를 ‘다른 것’으로 보는 창작 작가적 인식 능력과 상상력을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다. 작가를 왜 작가라 하는가? 평범한 일상사에서 보통 사람들은 얻지 못하는 ‘예술적 영감’을 얻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묻기 전에 현대문학을 설명해야 하것다. 현대문학이란 우리나라 문학예술 전반―음악, 미술, 무용, 연극, 영화 및 대중예술―은 갑오경장(1894)을 기점으로 고전문학적 방법에서 서구 현대 문예사조에 의한 창조적 예술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를 현대음악, 현대미술, 현대무용이라 부르고, 문학도 ‘현대문학’이라 부른다.

현대문학의 ‘창작 수필’로 태어난 ‘가을’은 탄생 100년이 넘도록 생일날을 알아준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수필의 날은 여태까지 없었단 말인가? 아니다. 벌써 스무 번이 넘게 생일을 쇠기는 쇠었다. 세 번이나 날짜를 바꿔 가며…. 그러나 어느 한 날짜도 현대문학의 수필의 날로는 정당성 확보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현대문학의 창작 수필로 태어난 ‘가을’은 태어나자마자 잊혀져 버린 이름으로 영원히 지하에 묻힐 뻔했다.

다행히 2007년에 이관희의 ‘창작 문예 수필 이론서’에서 발굴되고 평가되어 한국창작수필문인협회서 100주년 기념행사를 5년 전에 광화문 서울 신문사 옆 뉴국제호텔에서 가진 바 있다. 또한 한국창작수필문인협회에서는 ‘가을’이 발표된 날을 기하여 지난달 16일 광주시립 무등도서관 대강당에서 ‘수필의 날’을 선언했다. 앞으로 창작 수필이 우리 일상과 문학에서 의미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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