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여행의 추억- 송민석 수필가·전 여천고 교장
2022년 11월 23일(수) 00:30
여행하면 기차 여행이 떠오른다. 친숙한 교통수단으로 기차가 가장 먼저 등장한 탓이다. 기차의 규칙적인 덜컹거림이 심장의 고동처럼 들렸던 초등학교 시절 열차 여행은 얼마나 설레었던가.

도회지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자취하면서 먹거리가 동나면 친구와 교대로 시골집에 다녀왔었다. 매월 두 차례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4시간 남짓 열차를 타고 집에 내려왔다가 일요일에 올라가곤 하였다. 꿈 많던 시절 양손에 쌀자루와 보자기에 싼 김치 단지를 들고 플랫폼에 나가 기차를 기다리곤 하였다. 연착이 잦던 시절, 기다림 끝에 저 멀리서 시커먼 기차가 지축을 울리며 기적 소리와 함께 내 가슴 속으로 들어서는 것만 같아 설레던 기억이 새롭다. 그 기억 때문에 성인이 된 지금도 열차를 타게 되면 가벼운 흥분이 앞서는 것은 여전하다.

생각해 보면 열차는 느리고 덜컹거리던 완행이었으나 엄청난 문명의 이기였다. 도로가 형편없고, 고속버스도 없던 시절 아닌가. 그러다 보니 완행열차는 늘 만원이었다. 특히 서울행 야간열차는 객실과 객실 사이를 잇는 공간과 출입문까지도 가득 차서 신문지를 깔고 자리를 잡아야 했다.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 난간도 두려워하지 않고 매달려 가던 시절이었다.

열차 안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짐을 베개 삼아 기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기대어 가기 일쑤였다. 생면부지의 갖가지 사연을 지닌 사람들과 부대끼며 가는 길이었지만, 함께 간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기차 여행은 불편하긴 했어도 힘든 줄 몰랐다. 운 좋게 좌석이라도 잡게 되면 주섬주섬 삶은 밤이나 고구마를 꺼내 옆 사람에게 나눠주고, 누군가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어 객석의 무료함을 달래 주기도 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필자는 정년 후 1년 동안 매주 수요일 기차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새마을호를 타고 2시간 남짓 걸리는 여수~전주 간을 오고 갔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자동차를 운전하였으나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여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예기치 않는 도로 사정이나 날씨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전라선 열차를 타고 가노라면 봄이면 기적 소리에 놀란 벚꽃들이 차창 밖에서 눈송이처럼 날리고, 가을이면 코스모스의 깔깔대며 웃는 모습이 모두를 들뜨게 했다. 그뿐인가, 열차 카페에 앉아 커피 향과 함께 굽이굽이 섬진강 변을 따라 사색에 잠기는 행복은 금상첨화였다.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책을 읽는 재미도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다.

1960년대의 기차는 모두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증기기관차였다. 열차가 달리다가 중간역에서 석탄과 물을 공급받기 위해 쉬어가던 때다. 터널을 지날 때 창문을 닫지 않아 콧구멍이 시커멓게 될 때도 있었다. 그 후 1980년대 디젤기관차로 발전하더니 요즘은 숨 한 번 쉴 때 300m씩 내닫는 엄청난 속도의 한국형 고속열차(KTX)가 달린다. 간이역에 내려 다음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던 때를 생각하면 금석지감을 금할 수가 없다.

내 의식은 나이 들수록 아직도 전근대에 머무는 듯하다. 초고속 인터넷처럼 빠른 속도의 문화도 한몫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시간에 쫓겨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자꾸 잃어가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고속열차의 등장으로 창문을 열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차창 밖의 경치를 즐길 수 있는 ‘느림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길 위의 경험도, 차창 밖의 풍경도 상실의 시대를 맞고 있다. ‘속도는 기계의 시간, 느림은 자연의 시간’이라 하는데, 놓치고 사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속도에 밀려 사라져 가는 간이역 풍경이 그립다. 이는 우리의 마음 둘 곳이 하나둘 사라져 감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 늦기 전에 많은 사람이 머물다 간 삶의 흔적을 찾아 은행잎이 곱게 물든 간이역에 한 번쯤 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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