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의 성지 무등야구장과 챔피언스필드] ‘무등산 폭격기’ ‘바람의 아들’ 야구 전설 ‘5·18’ 광주 위로하다
2022년 08월 31일(수) 23:00
군부 정권 총칼에 맞서던 기개로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83~1997년 9번 우승
응원가는 주구장창 ‘목포의 눈물’…선동열·이종범 등장은 야구역사 한 획
초창기 5월18일 광주서 경기 못해…2014년 챔필 개장, 무등경기장 역사 속으로

1983년 광주무등경기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 모습. <광주일보 자료사진>

광주를 그야말로 쑥대밭, 초토화시킨 뒤 권력을 쥔 군벌. 그들이 세운 정당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정의당’. 민주도 어이없고 정의도 기가 막힌 거론이었다. ‘정의사회구현’ 여섯글자 현수막이 골목마다 나부끼던 광주에선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보는 것이 총칼에 대한 방어와 한풀이의 최소한이었다. 장군과 군벌과 보수정당이 프로야구를 만지작거릴 때, 광주 연고의 타이거즈 실력이야 불 보듯 뻔한 만년 꼴찌를 예상했을 것이리라. 그러나 뚜껑을 연 결과는 딴판이었다. 노동자 학생들의 데모하던 손은 투수의 와인드 업, 그러니까 야구공을 던지기 전에 양손을 휘젓는 동작으로 정확히 변모했다. 보크에 걸릴 만한 잔동작이라곤 하나 없이, 깔끔한 스트라이크. 총칼과 탱크에 맞서 짱돌을 던지던 그 기개로 야구는 불꽃의 저항이었다.

김성한(맨 왼쪽), 김봉연(가운데)
장군은 학살을 즐기며 검투사를 부리는 로마의 황제나 되는 것처럼 축구와 야구를 즐겼다. 그런데 그런 장군을 광주는 또 이겨먹었다. 월드컵 4강 신화가 광주에서 기록된 기적이었다면,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부터 1997년 까지 9번이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게다가 운빨이 아니라 순전 실력이었다. 창단식이 열린 1982년, 해태타이거즈엔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출신 선수들이 10명, 나머지 4명이 광주상고와 광주일고 출신이었다. 당시 그 초라함은 웃음거리였다.

투수가 부족하여 김성한은 1루수를 보다가도 투수 노릇까지 해야 했다. 미국야구에 전설의 타자 베이브 루스가 있다면 한국엔 김봉연이 있었다. 느닷없이 수염을 기르고 나타난 것은 교통사고로 300바늘을 꿰맨 흉터를 가리기 위함. 그는 꾸물꾸물 비가 왔다하면 온몸이 쑤시는 교통사고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닥치는 대로 홈런포를 쏘아올렸다. 무등경기장을 높이 날던 새들이 맞아 죽을 지경이었다.

1996년 한국시리즈 1차전 티켓을 얻기 위해 무등경기장 매표소에 몰려든 사람들.
응원가는 주구장창 ‘목포의 눈물’이었다. 무등경기장 가득 울려퍼지던 이 애닯은 노랫가락은 야구공이 아니라 무슨 눈물방울이나 되는 듯 서럽고 서럽게 ‘꺼억꺽’ 불러댔다. 유치장에서 꽁보리밥과 단무지로 사형수의 설움을 살던 정치인 김대중. 시민들은 ‘김대중’을 연호하며 노래의 끝엔 ‘김대중을 석방하라!’ 구호를 힘차게 모아갔다. 경기에서 이기는 날이면 아예 스크럼을 짜고 금남로까지 ‘경기장 밖 운동권’이 되어보기도 했다. 마침 무등경기장 근처는 모두 금속기계를 다루는 영세 공장들.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이 테이프에 감겨 뒤로 돌고는 하였다.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뚝뚝 잘려서, 한 개에 오만원씩 이십만원을 술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래, 야~야~야~야~. 사장님네 강아지는 감기 걸려서 포니타고 병원까지 가신다는데 우리들은 타이밍약 사다먹고요 시다신세 면할 날만 기다리누나”

투수 선동열
강하고 사납기만한 게 아니라 넉실거리는 표정을 가진 불세출 청년의 등장. 타이거즈 구단의 새로운 얼굴 ‘선동열’이라는 삿갓구름을 쓴 무등산 폭격기의 등장은 한국야구사를 바꿔놓았다. 두려움이라고는 없는, 간이 배 밖으로 뛰쳐나온 당찬 이 젊은이가 공을 던지는 시간엔 사위가 일체 고요해지고는 하였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면 시민들도 투구 연습에 돌입했는데, 더러는 거리의 반정부 시위에 가세하여 백골단을 향해 불꽃을 집어 던졌다. 야구장 가는 버스 안에는 대학가나 공단 지대를 경유해온 터라 최루가스가 항상 눅눅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5월을 기억하고 벌어진 수년 뒤의 6월 민주항쟁. 군벌의 회생과 부활, 또 다른 ‘대타’ 장군의 대통령 당선으로 광주는 프로야구 말고는 아무런 ‘낙’이 존재하지 못했다.

정치의 손아귀가 덜 미친 골목엔 꼬맹이 아이들이 캐치볼을 하고 놀면서, 제2의 선동열을 꿈꿨다. 한 기자가 쓴 선동열 선수의 구위에 대한 증언을 읽은 적이 있다. “공을 바닥에 패대기치는데 그 공이 중간에 사라졌다. 그러다 휙 소리와 함께 무릎 옆으로 꽂혔다. 칠 수가 없었다. 그게 직구였다. 오승환의 직구가 높은 데서 뚝 떨어지는 공이라고 한다면 선동열의 공은 바닥을 뚫고 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중간에 공이 보이지 않았다. 체질이 다른 직구였다.” 마구를 선보이던 그는 국내를 평정하고, 일본진출로 신화를 쓰고, 국내 프로야구 감독과 국가대표 감독까지 꽃길을 걸어갔다.

이종범
신은 광주에 또 한 명의 스타를 보내주었다. 예수의 공중 재림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의 시대가 열렸고, 이는 광주일고의 전성이였다. 무등경기장 근처 ‘광주일고’는 간판 야구 선수들을 길러내는 산실로 소문이 났다. 한 미국 신문에선 “어떻게 한 고교 팀에서 3명의 메이저리거를 동시에 낼 수 있느냐?”며 놀라워하는 기사를 써내기도 했다. 서재응, 최희섭, 김병현이 그 주인공. 여기에 프로야구 감독의 자리에 오른 선동열, 김기태, 염경업 등도 다들 일고 출신. 거기다 동문이자 마운드의 영원한 1번 타자 이종범은 난세의 영웅이었다. 야구공이 실밥 108개로 이루어졌음을 그대 아시는가? 불가에서 말하는 108 번뇌, 시민들은 이종범의 날쌘 주루를 보면서 번뇌 시름을 잠시 묵혀둘 수 있었다.

바람처럼 달리는 법, 잽싸게 사는 법을 보통 학교에서 배운다. 어떤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야구 글러브를 끼고 사는 손주랑 대화. “애야. 담임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너 오늘 오전수업만 하고 땡땡이 쳤다면서? 야구를 할 건가 공부를 할 건가 정해야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손주 왈 “아이고. 할아버지가 전화 받으시면 안되는데...” “왜?” “지난주에 할아버지 돌아가셨다고 며칠 결석했단 말이예요.” 공부를 때려치울 수 밖에 없는 친구들이 학교마다 꼭 있다. 전라도 광주에서 불세출의 야구선수들이 많이 나온 것도 특별히 공부할 분위기가 되지 않았거나(?), 차별과 낙후로 인해 먹고 살만한 다른 무엇이 없어서였기도 했겠구나 싶다.

절 마당의 기와에다 일일이 소원성취, 수능만점, 사업번창이라고 한마디씩 쓰듯이 야구장을 찾는 이들마다 좋아하는 선수 유니폼을 맞춰입고 소원을 비는 내용의 피킷도 들고 간다. 심심치 않게 야구선수 오빠에게 “우리 결혼하자!”는 구애를 펼치기도 했는데, 팬과 결혼한 선수들도 종종 있었다. 바람의 아들은 오래도록 오빠여야 맞았는데, 그래야 팬들이 경기장에 넘쳤을 텐데 아들을 낳았고, 아들도 뒤를 이어 국가대표가 되었다.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금남로 카퍼레이드.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전설의 1번을 지키며 한 시즌 최다도루 기록을 이태껏 가지고 있다. 그는 2루를 훔치는 전무후무한 도둑이었고, 팬들의 인기도 모두 훔쳤다. 도루 성공률이 8할이 넘는다는 건 나갔다하면 다이아몬드를 헤집어 놓는다는 말이렷다. 게다가 홈런도 이승엽과 경쟁할 정도였고, 통산 181개를 때려 한대화와 함께 역사상 20위권을 지키고 있다. 그랬던 그가 나이를 먹고도 대주자로 나서고, 비가 흠뻑 젖은 구장에서 도루를 시도하고, 악으로 깡으로 흙투성이가 되고는 했다. 해태에서 기아로 갈아탄 타이거즈에서 그런 노익장으로 버텨주었고, 타이거즈 출신 선수들은 야구종주국 미국, 야구선진국 일본과 짱짱하게 맞선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2006년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경기에서 4강, 2008년에는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나도 가끔 야구장에 가곤 한다. 바나나가 웃으면 바나나킥. 야구장에서도 바나나킥 같은 굴절되는 커브 변화구를 볼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해. 파울볼도 하나 잡아설랑 구경 나온 아이들에게 선물해주고도 싶고 말이지. 1루로 진출을 못해 아웃이 되면 이쪽 사람들은 “오매 또 돼져부렀네” 한숨을 푹 쉬고, 충청도 사람들은 아주 짧게 “갔슈~” 그러고... 아! 바람처럼 ‘갔슈’ 하면서 이종범도 은퇴를 했다. 김응룡 감독님 말씀이 떠오른다. “동열이도 가고, 종범이도 가고...” 그래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코로나 역병으로 야구장은 드문드문 열리고, 고약한 시절을 헤쳐나가는 바람의 아들의 또 아들, 그러니까 바람의 손주들은 여전히 투타에서 맹활약중이다.

임의진 작 ‘할아버지 체와 야구공 나비’.
무등야구장의 시대를 이어서, 그 곁에 건설한 ‘기아 챔피언스필드’가 개장한 것은 2014년, 지역 사회의 커다란 경사였다. 열악한 주차장 문제 등 과제가 많은 탄생이었지만, 광주에 이만한 경기장은 자부심과 할렐루야가 되었다. 콧잔등에 땀이 흐르고 손바닥에 땀이 솟아나는 경기장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무등산. 산허리를 타고 돌개바람이 홀짝 일어난다. 고개를 넘으면 솔솔 부는 가을바람.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졸라 야구장에 도착하면 역동감 넘치는 K-팝 응원가들이 쏟아진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목포의 눈물’을 부르던 때를 그린다. 초창기 오월 그날엔 광주 경기를 못하게 만들었다. 기록에 보니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부터 1994년까지 5월 18일 원정경기에서 7승 무패의 ‘기이한’ 기록을 남겼다.

임의진.
임의진=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 피는 마을’,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여행자의 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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