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노을-김향남 수필가
2022년 08월 29일(월) 03:00
노을은 아침에도 뜨고 저녁에도 뜬다. 아침노을이 눈부신 햇살을 거느리고 온다면 저녁노을은 어둠을 동반하고 온다. 아침노을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저녁노을은 하루의 끝을 알리거니와 노을은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며 우리의 삶을 견인한다. 그러나 아침노을은 밝아 오는 햇살을 따라 금방 잊게 되지만, 저녁노을은 그 여운이 참 하염없다. 언제 그랬냐 싶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건만, 그 덧없음으로 오히려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어느 해 지리산에 갔다가 뜻밖의 행운(!)을 만난 적이 있다.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숲에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고 자동차는 막 고개를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온 천지가 다 붉었다. 혹시 불이 난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들 만큼 놀라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절대 놓칠 수 없는 순간이라는 걸 직감한 나는 후닥닥 차에서 내렸다. 하늘과 해와 구름, 산과 들판과 마을 들이 함께 빚어낸 황홀한 콜라보였다. 나는 말더듬이였다. 내 입에선 겨우 우와아아, 아아아아 소리만 연이어질 뿐이었다. 말도 아니고 말이 아닌 것도 아닌, 울음도 아니고 웃음도 아닌 소리였다. 그 사이 노을은 더욱 성세를 이루어 그 빛깔이며 색채까지 오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퇴근길도 좋고 부엌 쪽창도 좋지만 그것과 댈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었다. 아침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었다. 아침이 저녁이 되고 저녁이 다시 아침이 되는 축복의 자리였다. 영원히 아침만 계속되고 영원히 저녁만 계속되는 삶이라면 얼마나 지루한가.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낮과 밤이 바뀌는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사실 노을은 언제나 뜬다. 하지만 낮과 밤의 오묘한 경계에 있는 데다 지속되는 시간도 매우 짧고(기껏해야 20~30분 정도?), 간혹 우천으로 취소가 되거나 희미한 잔광만 남긴 채 꼴딱 져버릴 때도 많아서, 그 ‘때’를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물론 관람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시간대가 바뀌는 것도 아니어서 여유만 가진다면 보지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이 늘 열려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고, 별다른 생각 없이 사소하게 흘러가 버릴 수도 있다. 아무리 흔해도 불현듯(불을 켠 듯이) 다가오는 때는 흔치 않은 일이다.

서남해의 섬 진도에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노을 명소가 있다. 때마침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고 구경하는 것 말고 달리 할 일도 없었으므로(우리는 2박 3일 진도 여행 중이었다), 자연히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바다 위엔 피노키오의 모자 같기도 하고 코끼리를 집어삼킨 보아뱀의 배 같기도 한 크고 작은 섬들이 떠 있다. 하늘은 그 사이로 노을이 스며들 것이다. 시간이 되자 어디서들 오는지 관람객 수가 더욱 늘었다. 아무리 유명하기로서니 누가 여기까지! 하던 생각은 곧장 내버려야 했다. 날은 어제도 흐리고 오늘도 흐리지만 사람들은 자꾸 밀려들었다. 변화무쌍한 것이 날씨라는 것을 다 아는 까닭일까. 하지만 그것도 삼대쯤은 족히 덕을 쌓아야만 가능했던 것일까. 돌연 취소된 공연장 앞에서 우리는 모두 바람 빠진 풍선이었다.

노을은 언제 봐도 좋지만 그중 최고일 때는 예상치 못한 순간이 아닐까. 몸도 마음도 녹지근해져 돌아올 때, 공연히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 흐리고 습하거나 구름 끼어 어두울 때, 외롭고 쓸쓸할 때, 권태롭고 지루할 때, 그때를 틈타 불현듯이(!) 오는 때다. 죽어 있던 감각이 화들짝 깨어날 때, 총총 눈빛이 살아날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 처음엔 하늘에 걸린 등불인가 싶었다. 뜬금없는 등불을 좇아 우리는 한 해변에 이르렀다. 아무도 없는, 한적하고 어둑한, 광활하고 조용한 해변이었다. 그곳에 노을이 불타고 있었다. 저 혼자서 노을이 세상을 불태우고 있었다. 나는 다시 벙어리가 되었다. 동글동글 잘 씻긴 몽돌 위에 앉아 우와아아, 아아아아 탄성마저 삼켰다. 노을은 마구 칠한 물감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바다까지 물들였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빛인지 어둠인지, 밤인지 낮인지, 삶인지 죽음인지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노을은 한 번 더 격하게 몸을 뒤틀더니 홀연 열반에 들었다. 우리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눈부시고 장엄한, 아름다운 열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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