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개관 전국 유일 단관 ‘광주극장’] 시네마 파라디소, 광주극장과 용문객잔 사이 천국은 어드메뇨
2022년 08월 11일(목) 01:30
‘명화극장’ 통해 만난 이소룡은 영웅, 홍콩영화 주역 장만옥은 첫사랑
광주사람이 세운 첫 극장…1200명 이상 수용 조선 최대 규모 자랑
예술영화 전용 극장 변신 ‘영화의 집’ 개소…영화가 흐르는 골목길 ‘눈길’

영화 전성기였던 1960년대 광주극장 풍경

어려서 읍내에 들어온 천막극장 서커스 구경이 재미났다. 멀리 인도나 유럽에선 호박잎처럼 넓적한 귀때기를 펄럭이는 코끼리 서커스도 있다덩만. 네온 간판만큼 커다란 눈을 궁글리는 코끼리가 등장하면 어린 나는 와륵 무서워 엄두도 못 냈을 구경. 부인의 지독한 전도에 못 이겨 교회로 끌려 나온 주정뱅이 아재들이 꼭 있었다. 그러나 교회 용어로 ‘영이 맞지 않아’ 펌프에서 누런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욕지기를 내뱉고선 하느님과 등 돌리고 말던 그들. 서커스 구경을 와서는 눈이 동글해져설랑 ‘감동에 감화받은’ 표정들로 싹 변했다. 천군 천사가 하강하듯 곡예사가 공중 그네타기를 하면 북조선 당대회보다도 가열찬 박수를 갈기고들 그랬다.

서커스 중간에 보여주는 차력이나 무술 쇼는 탄복이 절로 났다. 질통이나 곰빵을 짊어지고 다니던 일용직 잡역부도 철권 봉이나 장검을 휘두르며 대륙을 말 달리고 싶어했다. 닭 모가지를 매우 무료한 표정으로 내리치던 닭집 아짐의 생계형 무술 따윈 관심 바깥. 우리 모두는 영화 속의 무인들에 얼이 나갔다. 가끔 동네에 들어오는 유랑극단 서커스에서 펼쳐지는 ‘실사판 무술쇼’는 놀렐루야 아멘이었다. 서커스의 인기는 고스란히 극장으로 옮겨 붙었다.

학생단체관람 모습.
목사였던 아버지의 목회지를 따라 강진과 해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땅끝마을 비포장도로 유배지였음에도 모두 극장이 한 군데쯤 있었다. 보통 홍콩 무협 영화를 상영했는데, 중간에 필름이라도 끊기면 ‘싸이의 흠뻑 쇼’보다 많은 양의 ‘침물’과 ‘원성’을 영사실에 뱉어댔다.

한편 주말이면 기다리는 방송이 있었다. KBS의 ‘사랑방중계’나 ‘명화극장’에 나와 “놓치면 후회합니다”, “꼭 보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미션’, ‘시네마천국’, ‘애니’, ‘아웃오브 아프리카’를 소개했던 정영일 샘의 명화극장 예고편이었다. 그분을 내 인생 스승으로 삼고, 찬물에 세수하며 잠을 쫓고서라도 명화극장에 빠져들었다. 그분이 소개한 이소룡 아니 부르스 리의 ‘정무문’, 성룡의 ‘용형호제’등을 보고는 마치 사복음서를 독파한 수도사의 도력에 이른 듯 내적으로 충만해졌다. 표절 따위로 박사 학위가 흐지부지된 요즘 세상에서, 일약 ‘도사’가 되는 운명이 그 때 벌써 보였음에도, 아! 나는 왜 무술을 연마하지 않았더란 말이냐.

내 딴엔 나의 고국이 초원에 말달리는 대륙 벌판이라면 좋았겠다고 꽁냥댔다. 학교에선 박정희, 전두환에 충성하며 총칼에 무릎 꿇는 애국을 강요당했고, 목사관이자 집이었던 교회의 울타리에선 고대 유대 땅과 천상의 시오니즘이 강요되던 마당이었다.

추억의 배우 이소룡.
허나 홍콩영화에 빠져든 나는 무협이 난무하는 객잔들이야말로 내 파라디소 천국임을 확신했다. 인생의 묘를 가르쳐준 영화 ‘열혈남아’. 유덕화가 “말해, 니가 가면 나도 간다. 만약에 니가 죽으면 내가 복수해줘야 하니까” 우정과 의리 같은 것을 가슴에 끌어안게 만들었다. 그것은 나만의 국민교육헌장이었다. 건달 유덕화와 아우 장학우 앞에 나타난 장만옥은 내 첫사랑이었다. 유덕화는 총칼을 들고 나대면서 살았지만, 장만옥 앞에서는 개미만큼 작은 사내였다. 그랬던 그가 장만옥의 만류에도 장학우를 구하러 사지로 떠나다니. 오~ 그놈의 의리란 과연 무엇인가. 소문에 들은 지옥처럼 달구어진 소금밭을 철버덕 맨발로 뛰어다니며 생계를 짊어진 바닷가마을 머시매들. 그들의 축축한 의리나 꾸덕한 가족애 같을 것을 영화에서 맛보았다.

파리엔 파리극장, 뉴욕엔 뉴욕극장, 광주엔 광주극장. 광주의 기억을 하나 꼽는다면 광주극장을 엄지척. 만국기마냥 필름을 풀어놓으면 극장과 극장을 잇고 펄럭일 것만 같던 극장 지도가 있었다. 그러니까 태평극장, 제일극장, 아카데미극장, 그밖에도 여러 극장들이 있었거늘 세월속으로 죄다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옛 추억의 이름 광주극장. 마치 호금전 감독의 저 유명한 영화 ‘용문객잔’처럼 와이어를 매달고서 날아오르면 영화 속 객잔 주막인냥 변할 것 같은 극장 건물. 이 극장 외벽에 묶인 수많은 전깃줄들은 마치 홍콩 무협영화의 스턴트맨들을 묶은 와이어만 같구나.

시방은 무더운 8월 하고도 어느 날. 다시 보고픈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새삼 어룽거린다. 영화 속 흐르는 사운드트랙, 작곡가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풍의 바흐’가 불치병을 얻어 죽어가는 30대의 젊은 사진사 정원과 구청 주차요원 다림의 사랑을 촉촉히 적신다. 군산 신창동 복판 초원사진관처럼 광주극장 골목 어딘가에 있을 법한 정원(한석규가 분한 남주인공)의 사진관.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어 경찰서였던가. 머리를 쥐어짜고 통곡하던 정원. 장면이 바뀌어 다시 이불을 덮고선 서럽게 흐느끼던 정원. 그 애처로운 울음바다 해변으로 쓸려온 음표가 바로 ‘브라질풍의 바흐’였다. 극장 골목 주변으로 음반가게도 한군데 있어 이 곡 ‘브라질풍의 바흐’도 틀어줄 것만 같아라.

1935년 문을 연 ‘광주극장’은 여전히 영사기가 돌아가는 ‘현재진행형’의 공간이다.
1935년 문을 연 광주극장은 일제시대부터 지금껏 국내에 홀로 유지되고 있는 단관 상영극장이다. 광주극장은 순수 광주사람이 세운 첫 극장이었다. 그 전엔 일본사람 ‘구로세’가 만든 광남관이란 데가 있었는데, 훗날 제국관이라 이름을 바꿔 국정 홍보관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1930년대 중반 책방과 악기점을 하던 김준실이 극장을 건축하다가 자금난에 시달리자 정미소를 하던 최선진이 이를 이어받아 광주극장을 완공하는데 일본돈 30만엔을 썼다. 훗날 광주상고, 광주여상 등을 세운 유은학원의 설립자이기도 했다. 1200명 이상 수용의 극장은 당시 조선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해방후 지역의 지도자 최홍종 목사는 물론이고 김구 선생도 광주극장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1945년엔 광주 전남의 국악인들은 ‘해방기념 축하 대공연’을 열었는데, 명창 임방울, 박동실은 극장의 단상에 올라가 ‘해방가’를 울컥대며 불렀다. “반가워라 반가워. 삼천리강산이 반가워. 모두들 나와서 손뼉을 치면서 활기를 내어서 춤을 추어라. 이런 경사가 또 있느냐... 글을 배운 선비들과 육체 노동하는 여러분도 진충보국은 일반이라. 우리가 다 각기 힘을 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세. 반가워라 반가워. 우리나라 국기 반가워...”

극장은 화마를 겪기도 했다. 1966년 개봉한 영화 ‘용문객잔’이 왈패들에게 부서지고 불타오르듯, 1968년 극장에 큰불이 났는데, 설립자의 아들 최동복은 가업을 잇겠다는 각오로 재건축에 팔 걷고 나섰다. 1970년대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극장 사업은 내리막을 걸었다. 그럼에도 광주극장은 버티고 나아가면서 예술영화 전용 극장으로 자리매김해 갔다. 영화 간판을 그리던 화가 박태규는 혼신을 다해 외벽을 채워나갔으며, 극장을 이끄는 대표이사와 직원들의 영화사랑, 지역사랑은 ‘영화가 흐르는 골목’을 가꾸고 일궈나갔다. 2020년 12월 광주극장 옆 ‘관주 사택’을 재생하여 ‘영화의 집’이란 이름으로 개소하기도 했다.

얼마 전 은혜 씨가 주인공으로 분한 영화 ‘니얼굴’이 상영되어 광주극장을 찾았다. 앞서 서울 시사회에 초대받아 미리 보기도 했는데, 영화 주인공 발달장애인 은혜 씨가 또 만났다며 반갑게 손을 잡았다. 최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통해 인민들의 눈물샘을 터트렸던 은혜 씨, 광주극장을 찾은 광주의 팬들과 첫 만남 자리였다. 영화 속에서 ‘니 얼굴, 뷰티풀이지~’ 그랬던 환한 마음씨. 마치 우리는 모두 영화 속 주인공이나 된 듯 서로를 바라보고 자랑스러워했다. 영화가 끝난 극장은 캄캄하게 소등되고, 외등만이 켜지더라도 우리들은 헤어지지 못하고, ‘헤어질 결심’을 쉽게 하지 못하고, 성룡의 취권처럼 휘청거리거나 홍금보의 똥배처럼 볼록한 아랫배로 ‘붕괴’ 직전까지 생맥주를 나눠 마셨다. ‘마침내’ 극장 골목에서 우리는 안녕 인사를 나눴다. 다음에 또다시 만나자고, 다음에 또 영화를 같이 보자고, 다음에 또 영화 같은 하루를 함께하자고.

영화가 끝나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거기 무수한 이름들이 박혀있다. 가끔 그중에 당신 이름은 없는지 살피게 된다. 애쓰고 수고한 당신, 이 거리와 이 불빛을 지켜온 당신. 어릴 적부터 정의와 복수를 벼르던 무협의 세계에서 어느덧 장성한 뒤 ‘희생과 헌신, 사랑과 용서’까지도 통찰하게 된 당신은 멋쟁이. 장만옥보다 완벽한 내 이상형. 우리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깍지손을 살금 쥐고, 극장에서 나와 금남로와 충장로로 쏟아지면서는 팔짱을 낀다. 쑥스러워 멀찍이 걷는대도 마음만은 와락 기대 연정을 나눈다. 운명이 엇갈리고, 당신과 나란히 눕지 못한 채 헤어져도, 당신이 우러른 하늘이 광주 하늘인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꿈에선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보길. 부디 비운의 주인공이 아닌 해피엔딩의 주인공이길.

임의진
임의진-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 피는 마을’,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여행자의 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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