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음이 죽음의 기준이 됐던’ 시대가 주는 교훈-황옥주 수필가
2022년 06월 16일(목) 22:00 가가
1923년 9월1일 일본 간토 지방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은 천재지변이다. 포탄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순간에 집이 무너지고 불타고 땅이 갈라진다. 사망자나 행방을 모른 희생자가 40만 명을 넘었다 한다. 흉흉한 민심에 폭동이라도 일어날지 몰라 계엄령을 선포한 일본 정부는 분노의 대상을 조선인 쪽으로 몰았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인가를 돌아다니며 불을 질렀다’는 등 의도적으로 악소문을 퍼뜨렸다.
삼인성호라 세 사람의 거짓말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내는데 악랄하기 짝이 없는 수작이다. 타는 불에 기름 부은 격으로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격분한 무리들은 경찰과 합세하여 자경단 같은 단체를 만들어 조선인 골라내기에 혈안이 되었다. 문제는 외양만으로는 조선인을 판별해 낼 수 없는데 있었다. 그런데 언어 발음은 숨길 수가 없다.
일본어는 외국어다. 언어를 구사함에 있어 외국인의 취약점은 자기 나라 말에 없는 발음이다. 발음상 조선인이 틀리기 쉬운 말로 일본인들은 ‘쥬고엔 고짓센’(十五円五十錢··15엔 50전)을 골랐다. 특히 어려운 것은 탁음이다. 조선인들은 장단음 발음이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홀히 해 버리는 단점도 있다. 이를 써서 거리거리에 붙여 놓고 통행자들을 잡아다가 읽어 보라 강요했다. 귀로 일본어를 익힌 조선인들이 정확한 발음을 했을 리 없다. 서툴면 불문하고 칼과 창으로 현장에서 살해해 버렸다. 그 희생자가 7000명에 이르렀다니 천인공노란 말은 이럴 때 해당될 것이다.
모어가 일본말이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목숨이 한국말을 모국어로 쓴 사람의 후손으로 태어났기에 당한 비극이다. 그들의 잔인함은 그 후 태평양전쟁 중에도 드러났었다. 난징사태 때 마쓰이 이와네 사령관 밑에서 충성심을 경쟁한 젊은 두 장교가 난징이 점령될 때까지 누가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느냐 경쟁을 벌였다. 누군가는 살해 장면을 확인하며 심판(?) 노릇을 했을 터다. 무려 106명과 105명을 죽였다 한다.
전쟁은 사람 죽이기다.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 강한 쪽에서 일으킨다. 친하게 지내자 손가락을 걸었어도 강한 자가 심술부리면 그만이다. 불가침 각서를 백 번 썼대도 한낱 쓰레기일 뿐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 본보기며 교훈이다.
화면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황폐한 들녘을 볼 적이면 영화 ‘해바라기’가 떠오른다. 우수를 머금은 듯한 큰 눈의 소피아 로렌이 열연했던 그 영화다. 당시 이태리 독일군의 시체가 묻혀 있었던 해바라기 벌판에 지금은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뭇 주검들이 버려져 썩어 가고 있다.
나라는 민족의 단결로 강해진다. 그것은 지도자가 이끌기 나름이다. 지도자가 현명치 못하면 편이 생기고 편끼리 따로 놀면 망한다. 역사 공부를 새로 할 일이다.
당파 피해를 뼈저리게 느낀 영조는 각 당의 우두머리를 불러 모아 ‘탕평채’를 먹게 하며 당쟁을 막아보려 했으나 이미 고갱이가 썩어 버린 뒤였다. 정조 이후 무능한 임금들이 강성 신하들에게 휘둘린 탓에 500년의 역사가 무너져 버렸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발음을 잘못해 죽은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가들은 걸핏하면 애국을 내세워 통합이니 사면이니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찾아낸 듯 목소리를 높여 자기만이 애국자연한다. 속셈은 장삼이사도 다 안다. 죄인의 사면으로 통합이 이뤄질 거라면 죄가 미미한 서민 죄인부터 풀어 줘야 옳다. 권력을 악용한 죄는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할뿐더러 국가를 병들게 하는 악성이다.
책이 넘쳐나는 시대다. 회고록이나 자서전도 많다. 존경받은, 받았던 사람들의 글은 읽어 보지 말래도 읽는다. 변명코자 쓴 회고록이나 자서전은 서푼 가치도 없는 자원 낭비다. 이에 조지 오웰은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수치스런 것을 드러낼 때만 믿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쓰다 보니 원제에서 벗어난 것 같다. 글의 본뜻은 잘못되었던 역사를 거울삼아 새로운 민족 정신으로 극일을 하자는 말이다. 일본은 자타가 인정한 선진국이지만 정치적 내면이 교활하여 믿지 못할 이웃이다. 정신 바짝 차려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미워도 배울 것이 있다면 숨어서라도 배워야 한다. 이게 도광양회다. 살인의 구실로 삼았던 발음 ‘쥬고엔 고짓센’의 비극! 민족의 생채기가 너무 깊었다.
전쟁은 사람 죽이기다.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 강한 쪽에서 일으킨다. 친하게 지내자 손가락을 걸었어도 강한 자가 심술부리면 그만이다. 불가침 각서를 백 번 썼대도 한낱 쓰레기일 뿐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 본보기며 교훈이다.
화면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황폐한 들녘을 볼 적이면 영화 ‘해바라기’가 떠오른다. 우수를 머금은 듯한 큰 눈의 소피아 로렌이 열연했던 그 영화다. 당시 이태리 독일군의 시체가 묻혀 있었던 해바라기 벌판에 지금은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뭇 주검들이 버려져 썩어 가고 있다.
나라는 민족의 단결로 강해진다. 그것은 지도자가 이끌기 나름이다. 지도자가 현명치 못하면 편이 생기고 편끼리 따로 놀면 망한다. 역사 공부를 새로 할 일이다.
당파 피해를 뼈저리게 느낀 영조는 각 당의 우두머리를 불러 모아 ‘탕평채’를 먹게 하며 당쟁을 막아보려 했으나 이미 고갱이가 썩어 버린 뒤였다. 정조 이후 무능한 임금들이 강성 신하들에게 휘둘린 탓에 500년의 역사가 무너져 버렸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발음을 잘못해 죽은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가들은 걸핏하면 애국을 내세워 통합이니 사면이니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찾아낸 듯 목소리를 높여 자기만이 애국자연한다. 속셈은 장삼이사도 다 안다. 죄인의 사면으로 통합이 이뤄질 거라면 죄가 미미한 서민 죄인부터 풀어 줘야 옳다. 권력을 악용한 죄는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할뿐더러 국가를 병들게 하는 악성이다.
책이 넘쳐나는 시대다. 회고록이나 자서전도 많다. 존경받은, 받았던 사람들의 글은 읽어 보지 말래도 읽는다. 변명코자 쓴 회고록이나 자서전은 서푼 가치도 없는 자원 낭비다. 이에 조지 오웰은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수치스런 것을 드러낼 때만 믿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쓰다 보니 원제에서 벗어난 것 같다. 글의 본뜻은 잘못되었던 역사를 거울삼아 새로운 민족 정신으로 극일을 하자는 말이다. 일본은 자타가 인정한 선진국이지만 정치적 내면이 교활하여 믿지 못할 이웃이다. 정신 바짝 차려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미워도 배울 것이 있다면 숨어서라도 배워야 한다. 이게 도광양회다. 살인의 구실로 삼았던 발음 ‘쥬고엔 고짓센’의 비극! 민족의 생채기가 너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