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 관계 맺기의 은유에 대하여-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2년 06월 13일(월) 03:00
한풀 꺾인 팬데믹 상황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불가피한 관계의 단절은 각자의 생존을 위한 최선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관계의 유지와 이를 통한 상호작용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자 삶의 토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의 단절과 유지는 서로 대립적이고 모순적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어느 한쪽을 쉽게 포기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단절에 의한 고립은 삶을 위한 그 어떠한 선택도 형식도 될 수 없다. 이것은 삶의 총체성이 담보하는 의미 체계를 조각내어서 파편화·원자화할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절망감은 개인적·사회적·정치적인 것을 포괄하는 ‘나’ 자신의 상실로 인한 실존의 위기다. 이 실존적 단절감을 ‘무인도’에서의 삶으로 은유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관계의 과도한 뒤얽힘도 견딜 수 없지만, 한 오라기의 관계망도 없는 벌거벗은 상태에서도 살기 어렵다. 때로는 ‘타인 없는 세상’과 또 때로는 ‘타인들이 함께 하는 세상’을 욕망하는 이 양가적인 감정은 우리에게 늘 교차한다. 이럴 때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이라는 소설이다. 프랑스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고전으로 꼽히는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쓰기 한 소설이다. 디포의 주인공 로빈슨은 어느 날 무인도에 표류하면서, 섬의 원주민을 금요일(프라이데이)이라는 이름의 하인으로 삼고 무인도의 지배자를 자처한다.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오직 로빈슨의 서사, 그의 욕망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가 이 무인도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최대한 견고한 요새를 짓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작 육지에서 가볍게 여겼던 신앙심이 갑자기 깊어져서 회개하고 기도하고 일요일을 지킨다. 로빈슨은 타인이 전혀 없는 섬에서도 관계 속에 사는 것처럼 법과 관습, 문명과 이성을 수호하는 통치자 역할을 자임한다.

반면에 투르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통해서 로빈슨과 하인의 관계를 뒤집는다. 여기에서 금요일을 의미하는 방드르디가 제목으로 사용되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방드르디의 시선을 통해서 타인이 없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지배하고 통치하려는 인간 욕망의 실체를 드러낸다.

이 시선을 통해서 로빈슨의 독단이 드러난다. 로빈슨이 진리이자, 법이며 질서 체계라고 확신하며 욕망과 이성, 질서와 무질서, 문명과 야만 등의 대립 항들을 만들어 낸 세상을 이제 방드르디의 눈으로 전복하는 것이다. 방드르디가 로빈슨에게 결여되어 있는 타인이자 관계망이라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투르니에는 로빈슨에게 ‘우주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부속품인 타자’가 결여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면서 섬 자체도 살아 있는 생명체로 바라보는 방드르디라는 타자의 눈으로 이야기를 다시 쓴다.

로빈슨에게 섬이 야만과 무질서로 보이는 이유는 무인도에 대한 상황 판단의 기준과 의미를 과거로부터 끌어오기 때문이다. 무인도를 통치하는 총독이자 제독·재판관이지만, 그 기준은 현재의 장소와 전혀 다른 곳에서 가져 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로빈슨은 과거부터 익숙한 세계를 외딴 섬에 이식하고 재현하려 할 뿐이다. 그리고 이 판단이 이성적이며 절대적이라고 믿는다. 무인도라는 공간에서 진리와 질서 체계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방드르디도 처음에는 백인인 로빈슨을 주인으로 섬기지만 도구적 인간으로 사는 속박을 결국 거부한다. 이 지점에서 투르니에는 로빈슨이 섬 안에서 또 다른 자신의 섬에 갇혀 있음을 보여준다. 타인 없는 세상, 낯선 목소리가 없는 세상, 타인이라는 거울이 없는 세상, 바로 그 곳이 바로 은유로서의 무인도다. 우리가 사는 척박한 삶의 환경은 내면에 고립의 무인도를 향한 강한 유혹을 자극한다.

확실한 것은 모두가 갈망하는 삶은 자신의 고유성을 양도하지 않는 삶, 동시에 타인과 세상이라는 지평 위에서 얻어지는 나의 총체적 실존의 의미로 귀결된다. 우리는 수많은 무인도, 즉 사회적·정치적·도덕적·문화적 무인도에 살면서 세상과 대화할 수는 없다. 우리들 내면의 무인도를 허물자.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타인과 타자의 의미를 회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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