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빚’을 되새기며-노영기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2022년 06월 10일(금) 01:00
제주도도 그렇지만 여수도 명승지가 많다. 엑스포가 열리면서 지금은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이지만, 의외로 알려지지 않아 주민들만이 주로 찾는 장소가 있다. 그런 장소 중의 하나가 제주도에서는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이며 여수에서는 만성리의 ‘형제묘’이다. 무덤이지만 주변에 명승지가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두 곳에는 한동안 알려지지 않은 현대사의 비극이 숨겨져 있다.

제주도 송악산 인근에 알뜨르 비행장이 있고, 그 옆으로 야트막하게 섯알오름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끝 무렵에 일제는 제주도를 옥쇄지로 만들고, 이곳에는 비행장과 탄약고를 조성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뒤로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다. 그렇지만 때로는 사람들의 기대가 독 깨지듯이 깨지기도 한다. 1948년 4·3사건 이후 제주도에서는 학살의 광풍이 휘몰아쳤고, 사람들은 이제 잠잠해질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예비 검속의 광풍이 들이닥치고, 뒤이어 132명의 주민들이 섯알오름에서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 그 뒤로 군경은 이곳의 출입을 막았다. 7년 뒤에야 찾아갔을 때 시신은 뼈만 남았다. 유족들은 시신을 한데 모아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라며 ‘백조일손지묘’를 만들고 해마다 7월 칠석날 함께 제사를 지냈다. 4·19혁명 이후 유족들은 ‘백조일손지묘’의 비석을 세웠으나 1년 뒤 5·16쿠데타 세력들은 비석을 깨뜨려 파묻었다. 1993년 8월 24일에야 위령비를 세울 수 있었다. ‘학살·왜곡·은폐·탄압’ 등이 한국 사회의 지배층이 학살을 대면하는 ‘법’이었고, 정부는 ‘연좌제’로 유족들을 옥죄었다. 제주도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1948년 10월 19일 새벽 여수 신월리 육군 제14연대 병영에서 ‘동족상잔’(同族相殘)에 반대하는 총성이 어둠을 깨뜨렸다. 그로부터 시작된 여순사건은 순식간에 전남 동부지역을 휩쓸었다. 직접적으로는 제주도 파병에 반대한 것이었으나, 그 배경에는 해방 직후부터 쌓여온 문제들이 폭발한 것이었다.

정부는 대전 이남의 육군 병력을 비롯해 해군 함정과 육군 항공대(공군의 전신)의 비행기, 장갑차 등 최신 무기를 동원했다. 미군도 각종 물자와 미군 고문관들을 내려보내 진압을 주도했다. 10월 27일 정부군이 여수를 탈환함으로써 진압 작전은 일단락됐다. 반군은 지리산과 백운산 등의 산으로 들어갔고, 정부군은 계속 빨치산 토벌을 전개하는 한편 ‘부역자 처벌’을 시작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법회의가 열렸다. 그나마 군법회의에 회부된 사람들은 나은 편이었다. 부역 혐의자들은 혐의나 증거도 없이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 여수여중 교장 선생님도, 순천지검의 현직 검사조차 ‘즉결 심판’됐다. 이름 있는 유지급 인사들조차 이러했으니 이름 없는 민초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와중에 제주도의 ‘백조일손지묘’와 같은 무덤이 생겨났다. 마래터널을 지나 만성리 해수욕장 가는 길에 있는 만성리 ‘형제묘’이다. 이른바 ‘부역 혐의자’로 몰려 증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수용됐던 123명의 주민들이 1949년 1월 3일 학살됐다. 이들의 시신은 장작불에 태워 만성리 계곡에서 돌로 덮여졌고, 유족들이 시신을 찾아가지 못하도록 감시했다고 한다. 희생자의 유족들은 시신을 찾을 길이 없자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고 이름을 붙였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알려져 답사지로 거쳐 가야 할 장소가 됐으나 한동안 이곳은 쉬쉬하며 감춰진 곳이었다.

최근 여순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제 ‘법대로’ 수십의 세월을 숨죽이며 피눈물을 삼키던 분들의 억울함을 풀어 줘야 한다.

2018년 제주 4·3사건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에서는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제주도만의 구호가 아닌 여순사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역사의 빚에 눈감은 채 내일로 나갈 수는 없다. 역사의 빚은 언젠가는 다시 더 큰 눈덩이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역사가 가르쳐 준 준엄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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