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된 광주 사람들’-이영화 비움박물관장
2022년 05월 17일(화) 00:30
나는 가끔씩 꿈속에서 역사의 길을 걸었던 큰 사람이 된다. 우리 백성을 문화에 눈뜨게 하는 왕이 된다. 그런 한국 문화를 지키는 장군이 되기도 한다. 나 어쩌다 꿈속에서 역사의 큰일을 한다. 우리 문화의 따스함으로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만으로 얼어 있는 한반도를 녹여서 써레질하고, 한반도에 쳐진 철줄 따라 풀무질하며 평화를 기다린다. 가끔씩 꿈속에서 되었던 큰 사람, 어쩌다 꿈속에서 큰일 한 사람, 꿈속의 나를 위해 나는 평생을 현실 속에서 우리 백성이 던져 버린 전통문화의 씨앗을 모으고 이 나라가 끊어 버린 한국 문화의 정신 줄을 잇고자 한다.

1970년대 초 한국의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 조그만 농촌마을로 시집을 왔다. 전쟁처럼 초가지붕이 헐리고 그 속에 살던 조상들이 직접 만들어 쓰던 생활용품들이 플라스틱에 밀려 버려진 것들을 지난 반백 년 동안 모으고 닦고 어루만지며 보관했다. 그러다 2016년 칠순의 할머니가 되었을 때 가족들의 격려와 도움으로 광주시 동구 서원문 터에 민속박물관을 세우게 되었다.

고대 광실 박물관에 무덤처럼 박제되어 있는 수준 높은 고미술품이나 골동품이 아니라, 마을공동체를 이루며 한반도에서 수백 년 동안 가난을 이겨내며 기어코 살아 낸 민중들의 솜씨와 맵시, 마음씨가 세월을 머금고 빛깔로 색깔로 때깔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줄 서 있는 민속박물관이다. 한국의 부엌·안방·사랑방·마당 문화, 출산문화에서 장례문화까지 수 만 점의 민속품들을 갈무리하면서 아름다움의 자유는 계량을 초월한다는 걸 깨달았다.

솔직히 21세기 최첨단의 기술과 문명 앞에서 차고 넘치는 물질의 동요 속에서 더 많이, 더 높이, 더 멀리만 달려가는 숨 가쁜 현대인들에게 행여 냉소와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허나 그간 우리가 누렸던 호사와 기계문명에 의존한 정신적 빈곤은 사람다움을 잃어가는 회색빛 우울로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어느새 기후적 재앙이 되어 지구를 병들게 한다니 말이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가 업어 가도 정신 줄만 놓지 않으면 산다고 했다. 나는 박물관에 머물고 있는 이 작고 소박한 유물을 통해 서로 돕고 서로 나누는 두레정신을 삶의 으뜸으로 삼았던 한국인들의 정신을 보여 주고 싶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고 어떤 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먹거리를 나누던 고봉밥의 인심을 현대인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때 맨손으로 쥐어 나르며 지켰던 민주주의도, 어쩌면 그 작은 주먹밥도 우리 전통문화의 힘이 아니었을까. 광주민중항쟁 42주년을 맞이하여 모든 사람들을 가족으로 대접해 주던, 한국 역사의 고비마다 역사 발전에 기여했던 광주, 광주 사람들에게 조상들이 직접 도자기에 새긴 목단꽃과 비단에 수놓은 목단꽃을 바친다.

5월 18일은 ‘세계 박물관의 날’이기도 해서 오월에 피어나는 목단꽃을 통해 광주와 광주 사람들에게 복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박물관에 전시된 200여 점의 목단꽃으로 함께 관용의 시간을 갖고 있다. 전시 ‘꽃이 된 광주 사람들’전은 5월 한달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또 광주의 자존감으로 광주 사람의 인심으로 평화의 밥꽃이 된 주먹밥을 18일 비움박물관을 방문하신 모든 분들과 나누고자 한다. 해마다 아픈 오월을 달래고 어루만지고 승화시키는 데 힘쓰려 한다.

아무리 거친 문명의 비바람이 몰아쳐도 낮게 낮게 자리잡고 문명의 번들거림을 휘감고 도는 한국 문화의 텃밭으로, 기다림의 언덕으로, 그리움의 동산으로 한국 문화의 발전소 역할을 하고자 한다. 한반도에 피어나는 평화의 들꽃이 되고 지구촌을 살리는 사랑의 묘약이 되면 더 좋을 듯하다.

한옥의 대청마루에 서 있는 쌀뒤주의 조형미는 한국 어머니의 품속처럼 든든함으로 박물관을 지키고 있다. 어디 쌀뒤주뿐이랴. 한국 보자기의 단순성과 실용성. 아기를 감싸주던 포대기의 엄숙함. 한국 여인의 허리를 감싸주던 한복 치마의 우아함. 치성의 공간에 걸려있는 무쇠솥의 당당함. 그 집 장맛을 보면 그 집안 품격을 알 수 있다는 장독대의 반짝이는 아름다움까지.

나는 한국 문화의 아름다운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아름다움의 반란을 꿈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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