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선한 사마리안 정신과 생명 나눔-최용수 광주기독병원 병원장
2022년 05월 11일(수) 23:00 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의료 활동과 관련된 특징은 1980년 5월 21일 도청 앞 발포에 따른 집단 사상자 치료의 선한 사마리안 정신과 수혈할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생명을 살리고자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헌혈에 동참한 생명 나눔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자료 총서 기록에서 당시 의료 활동을 재구성할 수 있는 자료는 ‘전라남도 부상자 지원 현황 보고서’인데, 이를 기준으로 광주시 네 개 병원에서 치료했던 환자를 진료 일자별로 재구성해 보면 1980년 5월 21일 도청 앞 발포에 따른 부상자 치료 현황을 이해할 수 있다. 도청 앞 발포된 5월 21일 광주시내 병원에서 5·18 관련 부상으로 입원 치료가 필요했던 진료 현황을 분석해 보면 광주기독병원 70명(47.9%)을 비롯해 적십자병원 45명(30.8%), 전남대병원 26명(17.8%), 조선대병원 5명(3.4%)이다. 이어 5월 22일은 전남대병원 29명(46.4%), 광주기독병원 14명(25%), 조선대병원 12명(21.4%), 적십자 병원이 1명(1.7%)이다.
부상자 중 구타 등을 제외한 총상 관련 환자를 기준으로 재구성하면 당시 진료 현황을 보다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다. 5월 21일 총상 관련 환자는 광주기독병원 38명(60.3%), 적십자병원 15명(23.8%), 전남대병원 10명(15.8%)이다. 또 5월 22일에는 전남대병원 13명(46.4%), 광주기독병원 8명(28.5%), 조선대병원 6명(21.4%), 적십자병원 1명(3.5%) 등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5월 21일과 22일 양일에 발생했고, 그중 총상(50.5%)과 구타 등과 관련된 84명(41.5%)의 사상자에 대한 입원 치료를 광주기독병원에서 담당했다.
전반적인 의료 상황에서 광주기독병원에 많은 환자가 몰렸던 이유를 당시 재직했던 광주기독병원장의 보고서는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계엄군의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지만 광주기독병원은 휴진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광주기독병원은 예전부터 치료비 걱정 없이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공감대, 셋째는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병원에 오길 두려워했었는데 광주기독병원은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신뢰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광주기독병원은 민주화운동 이후에도 부상자들을 가족처럼 치료하고 돌봄으로써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을 빛냈다. 5·18 당시 의료 현장에는 수혈할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생명을 살리고자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헌혈에 동참했다. 현장의 응급실장 회고에 의하면 헌혈을 원하는 시민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으며, 수혈 백이 없다고 하니 시민들이 적십자병원에서 가져다주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금희는 1980년 5월 21일 오후 헌혈을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듣고 발걸음을 광주기독병원으로 향했다. 한 시간 정도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겨우 헌혈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 양림다리를 지날 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금희의 배와 허리에 명중했다. 금희는 자신이 헌혈한 바로 그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조금 전에 헌혈하고 갔던 여고생이 피투성이 시신으로 다시 응급실에 실려 오자 보는 이 모두가 경악했으며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변했다.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광주시민은 남녀노소 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서로 돕고 위로하였다. 금희가 나누고자 하였던 또 하나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오월의 생명 나눔 정신이 미래의 사명자로 우리에게 있음을 잊지 않고자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자신의 영광과 인기를 위해 구제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한데 이제 왼손도 알게 하고자 함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4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성취된 흔적이 있는 과거,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과 생명 나눔 정신, 즉 우리가 기억해야 할 과거라는 점에서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는 성경 말씀 같이.
전반적인 의료 상황에서 광주기독병원에 많은 환자가 몰렸던 이유를 당시 재직했던 광주기독병원장의 보고서는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계엄군의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지만 광주기독병원은 휴진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광주기독병원은 예전부터 치료비 걱정 없이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공감대, 셋째는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병원에 오길 두려워했었는데 광주기독병원은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신뢰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광주기독병원은 민주화운동 이후에도 부상자들을 가족처럼 치료하고 돌봄으로써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을 빛냈다. 5·18 당시 의료 현장에는 수혈할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생명을 살리고자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헌혈에 동참했다. 현장의 응급실장 회고에 의하면 헌혈을 원하는 시민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으며, 수혈 백이 없다고 하니 시민들이 적십자병원에서 가져다주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금희는 1980년 5월 21일 오후 헌혈을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듣고 발걸음을 광주기독병원으로 향했다. 한 시간 정도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겨우 헌혈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 양림다리를 지날 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금희의 배와 허리에 명중했다. 금희는 자신이 헌혈한 바로 그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조금 전에 헌혈하고 갔던 여고생이 피투성이 시신으로 다시 응급실에 실려 오자 보는 이 모두가 경악했으며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변했다.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광주시민은 남녀노소 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서로 돕고 위로하였다. 금희가 나누고자 하였던 또 하나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오월의 생명 나눔 정신이 미래의 사명자로 우리에게 있음을 잊지 않고자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자신의 영광과 인기를 위해 구제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한데 이제 왼손도 알게 하고자 함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4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성취된 흔적이 있는 과거,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과 생명 나눔 정신, 즉 우리가 기억해야 할 과거라는 점에서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는 성경 말씀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