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공간은 어떻게 탄생하는가-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2년 04월 11일(월) 00:45 가가
공간이 시간과 함께 삶을 위한 기본조건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말이다. 공간과 시간은 서로 상호의존적 관계 안에서 의미를 충족한다. 그런데 요즘 느닷없이 공간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귀가 아프게 분분하고, 이에 대한 혼란스러운 정보에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일정한 공간과 시간의 형식 안에서, 즉 집·직장·학교·놀이터 등의 공간들에서 자신의 뜻과 목표를 위한 활동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간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온갖 사물과 사건, 실존하는 사람들의 생활과 이야기들로 가득 차서 서로 관계를 이루는 곳이다. 또한 공간은 우리가 세계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며 토대이자 시간을 쓰고 그 결과를 만들어 내는 현장이다. 그래서 공간은 단순히 돈과 물성적인 것으로 만들어진 사물이 아니고, 서로의 활동을 공유하며 시간을 통한 활동과 감정, 느낌을 저장하는 곳이다. 공간과 시간의 역사가 곧 인간의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의미 있는 사유의 방향들을 보여주는 철학자들이 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공간의 문제를 삶의 문제, 실존의 조건으로 다룬다. 그는 공간을 삶에 있어서 매우 근본적인 것으로 본다. 공간이 어떻게 성립하며, 사물을 수용하고, 아우르며, 간직하면서 삶의 공간이 되는가? 우선 사람은 세계 안의 존재로서 공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공간에 일방적으로 지배되거나 함몰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공간을 세운다고 해도 안을 채우는 삶의 방식이 여전히 획일화된 관습에서 나온다면, 공간과 삶의 관계는 이전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그럭저럭 기계적으로 영위하는 모습의 주거는 할 수는 있지만, 친밀한 내적 소속감과 외부와 조화를 이루는 실존적 거주는 불가능하다. 현재적 시간을 비본래적인 것의 소유를 위해서 소진하는 한 본래적인 삶의 의미는 소외되고 배제되며 미래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소유를 위한 공간에서 삶의 본래적 의미를 다시 세우는 힘은 생성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오직 이해관계에 얽힌 현재가 있고, 이로 인해서 시간들은 창조성을 잃는다.
공간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철학자는 프랑스의 앙리 르페브르다. 그에 의하면 공간은 사회적 구조의 생산물이다. 사회적 힘과 특정한 권력에 의해서 공간은 생산되고 배치되며 재생산된다. 그래서 공간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권력도 없으며, 공간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으로 보이는 모순은 공간의 힘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배후에 있는 사회의 모순이 곧 공간의 모순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인데, 그것을 공간의 문제로 사람들은 인식한다.
다시 말하면 공간이 스스로 힘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 경우 문제의 심각성은 진실된 공간이 따로 있고, 그 힘에 대한 믿음이 사고자의 머릿속에서 이미 만들어지고 정형화된 다음, 이 맹신을 사회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하며 ‘진실된 공간’을 찾아나서는 것에 있다. 그러나 찾아야 할 것은 미리 결정된 진실된 공간이 아니고, 새로운 공간 안에서 생성되고 공유되어야 하는 공간의 진실이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사람은 공간 안에 갇히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고 공간을 사용하고 내용을 채우는 주체라는 인식이다.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인 공간은 집일 것이다. 좋은 집의 의미가 무엇인가. 좋은 터에 요란한 집을 지어서 눈길을 끄는 경우는 많지만, 정작 좋은 집의 조건은 그 안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내용이고, 관계가 억압되거나 왜곡되지 않는 거주의 공간이자 기억을 공유하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근사한 집 안에서의 불행한 삶, 얼마나 흔한 이야기인가. 좋은 공간에서는 삶의 상호성의 의미와 가치가 실제적으로 새롭게 채워지고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면서 완성된다.
결국, 좋은 공간의 탄생은 사용의 문제이며, 우리의 의식과 태도에 달려 있다. 공간은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인 것 또는 어떤 주술적 힘을 가진 자연물이 아니다. 우리가 공간의 영향을 받는 만큼이나 반대로 영향을 줄 수 있다. 여기에 공간의 쓸모와 그 가치를 결정하는 주체가 우리 자신임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하면 공간이 스스로 힘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 경우 문제의 심각성은 진실된 공간이 따로 있고, 그 힘에 대한 믿음이 사고자의 머릿속에서 이미 만들어지고 정형화된 다음, 이 맹신을 사회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하며 ‘진실된 공간’을 찾아나서는 것에 있다. 그러나 찾아야 할 것은 미리 결정된 진실된 공간이 아니고, 새로운 공간 안에서 생성되고 공유되어야 하는 공간의 진실이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사람은 공간 안에 갇히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고 공간을 사용하고 내용을 채우는 주체라는 인식이다.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인 공간은 집일 것이다. 좋은 집의 의미가 무엇인가. 좋은 터에 요란한 집을 지어서 눈길을 끄는 경우는 많지만, 정작 좋은 집의 조건은 그 안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내용이고, 관계가 억압되거나 왜곡되지 않는 거주의 공간이자 기억을 공유하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근사한 집 안에서의 불행한 삶, 얼마나 흔한 이야기인가. 좋은 공간에서는 삶의 상호성의 의미와 가치가 실제적으로 새롭게 채워지고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면서 완성된다.
결국, 좋은 공간의 탄생은 사용의 문제이며, 우리의 의식과 태도에 달려 있다. 공간은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인 것 또는 어떤 주술적 힘을 가진 자연물이 아니다. 우리가 공간의 영향을 받는 만큼이나 반대로 영향을 줄 수 있다. 여기에 공간의 쓸모와 그 가치를 결정하는 주체가 우리 자신임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