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들] “기울어가는 나라 바로 세우자” 성재 기삼연
2021년 12월 02일(목) 23:00
<23>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들
②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성재 기삼연
진사 기봉진 막내 아들, 책읽기보다 뛰어놀기를 즐겨
1895년 장성서 의병 300명 모집 여러 읍에서 활약
1908년 광주서 처형…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기삼연의 묘소. 2009년 5월 생전에 살았던 하남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로 이장했다.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택,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 같다 전해산(전수용), 싸움 잘한다 김죽봉(김준),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안규홍), 되나 못 되나 박포대.”

1907년 겨울 백양사 인근 동네아이들이 부른 노래다.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이 고장 의병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노래는 지은이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동네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기삼연은 1851년(철종 2년) 1월 18일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에서 진사 기봉진의 네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는 경노, 호는 성재로 어려서부터 책읽기보다 뛰어놀기를 즐겨했다. 위로 학연, 량연, 관연 등 세 명의 형은 학문 정진에 힘써 1876년 진사시에 나란히 합격했으나, 삼연은 경서와 병서를 읽었다고 한다.

삼연은 홀로 집을 나와 방황하며 고행에 나서기도 했는데, 삼종질(팔촌형제의 아들)인 기우만, 고광순 등과 만나 개화와 쇄국의 혼돈의 시기, 이에 대응할 준비가 안 돼 있음을 한탄하기도 했다. 1893년 1월 동학운동, 1894년 6월 청일전쟁, 1894년 7월 갑오경장 등이 계속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는 계속됐다. 삼연은 일본 강압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려 자주의 길을 개척하자고 주장했으며, 이후 두문불출하며 사냥으로 소일했다. 아들 우생과 수연산에서 활쏘기, 말타기를 하며 지형지세를 살펴 화약과 실탄을 숨겨두는 등 앞으로 있을 일제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삼연은 기우만의 의병소에 참여해 고광순, 이학상 등과 함께 광주에 호남대의소를 마련했으며, 충북 제천에서 거병한 유인석 등 전국 팔도에 격문을 보냈다. 삼연은 포수와 건달들 300여 명을 불러 모아 “나라가 없으면 백성도 없으며, 양반·상놈의 구분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역설, 가재를 팔아 옷을 해 입히고 군대로 조직했다. 호남에서 의병의 기운이 거세지자 일본의 압력을 받은 고종은 전국에 의병 해산을 위한 선유(宣諭)조칙을 내렸으며, 선유관인 신기선이 직접 전주에 내려와 의병 해산을 종용하고 설득했다.

결국 기우만이 거병 한 달만에 해산을 명하자 삼연도 귀가해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삼연은 평안북도 초산군수로 있던 둘째형 량연을 찾아가 벼슬을 그만둘 것을 권유하고, 동학운동을 변호했으며, 복잡한 국내 정세를 친구인 곡성군수 이문영과 상의하는 등 자신이 나아갈 길을 고민했다.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청나라 유학을 계획했으나 청일전쟁이 일본 승리로 끝나자 이를 포기하고, 일본과 맞서 싸우기로 한 것이다.

기삼연이 사랑채를 짓고 거병을 위한 동지들을 규합했던 장성 보용산.
삼연은 량연 등 주위의 만류에도 해산한 의병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막내딸이 혼사를 치르고 난 뒤 1902년 2월 다시 거병하기로 했다. 혼사가 막 진행될 때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리더니 진위대 군사가 들이닥쳤는데, 당시 관찰사 조한국의 명을 받아 전주진위대장 김한정이 삼연을 체포하러 온 것이었다. 삼연은 전주감옥에 갇혀 10여 일을 머물다가 한양 평리원(한말재판소로 1895년 의금부를 고등재판소, 1899년 평리원이라 개칭했음)으로 옮겨졌다. 평리원장은 이용태로, 장흥부사로 지낼 당시부터 기삼연과 알고 지냈다. 이용태는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삼연을 지켜보다가 옥리에게 비밀리에 풀어주라는 밀령을 내렸다.

한강을 건넜으나 곧바로 고향으로 갈 수 없어 3년여를 방랑하다가 1906년 고향인 장성에 내려온 그는 26세로 장성한 아들 우생에게 거처를 수연산 기슭 송계마을(장성군 서삼면 축암리)로 옮길 것을 지시하고 본격적인 거병 준비에 들어갔다. 자신은 매일 장성 저잣거리에 나와 술을 마시며 폐인처럼 지내 일본 헌병대와 관가의 감시를 피하고, 다른 이들의 술값을 내주는 등 인심을 얻었다. 28세의 종손 기형도가 삼연이 폐인이 됐다는 소문에 찾아와 확인할 정도였다. 몰래 왜적과의 일전을 준비하며, 기형도의 집에 보관돼 있던 사냥총 다섯 자루 등 병기와 군량미를 모아나갔다. 기형도는 당시 관가에 보관돼 있어야 할 총의 행방을 묻는 진위대원과 일본 헌병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어렵사리 수십자루의 총을 모은 삼연은 화약과 실탄을 구할 수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화약은 일제가 지정한 제약사(製藥師)가 지정된 제약소(製藥所)에서만 만들도록 해 더더욱 귀했다.

삼연은 김용구 등과 거사를 논의하면서 믿을 만한 제약사를 찾아나섰으며, 오줌찌꺼기에서 화약의 원료인 초석을 추출하기 위해 의병에 가담한 자들에게 오줌찌꺼기를 모으도록 지시했다. 또 실탄을 직접 만들기 위해 잘 알고 지내던 박 포수라는 사람을 불러들이고, 둘째형 량연에게 쇠붙이와 군량미를 지원 받아 대장간을 만들었다. 원시적인 방법으로 10여 명이 들러붙어 경우 쓸만큼의 실탄과 화약을 챙긴 삼연은 다시 의병들의 의복과 군량미를 더 마련하기 위해 장성군 북상면에 사는 이용중을 찾아가 군사자금을 요청했다.

66세 고령이지만 우국의 선비이자, 해남군수 등을 지낸 뒤 고향인 장성에 내려와있던 이용중은 삼연의 거병 사실을 알고 군자금 900냥을 보내왔다. 당시 쌀 1섬에 8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20석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1907년 9월 수연산 중턱 석수암에서 장정 100여 명을 모은 삼연은 영광, 장성, 고창에서 일본인을 몰아내자고 호소하고, 의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유와 시정책을 상소로 올렸다. 상소에서 삼연은 나라를 다스리는 조정 중신들의 그릇된 정사와 임금의 실책을 간곡히 표현하며 시정을 요구하고, 백성의 도리와 자신의 할 일을 명시했다. 또 상소에 이어 거병의 의미를 담은 책자를 만들어 “지금이라도 올바른 정사를 펴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울 것”을 진언하고, 거병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왜적을 몰아내는데 협조를 당부했다.

1906년 들어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거병해 왜적들을 괴롭혔다. 태인 최익현을 필두로, 임실·순창·곡성을 석권한 임병찬, 남원성에 입성한 양한규 등이 성과를 냈다.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이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사실을 세계에 폭로했으며, 이에 일제는 1907년 7월 18일 고종 양위 조칙을 발표하고, 8월 1일에는 제1연대를 시작으로 한국군을 강제 해산시키는 등 강제병합을 위한 속도를 높였다. 울분과 분노, 한편으로는 각성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삼연은 500여 명으로 규모가 커진 의병의 대오를 정비했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에 추대된 그는 대한매일신보사에 “나라가 부서지고 집이 망하였다. <중략> 여러 군자께서는 춘추의 대의로 곧은 붓을 잡아 몸은 신문사에 있으며 손으로 역사의 일기를 기록하여 천지의 바른 윤리를 돌리어 인민의 귀와 눈을 넓히면 인의로 성벽을 삼고 필묵이 무기가 되어 시골군사 10만 명보다 나을 것이오니 더욱 높고 깊게 힘쓰시오. 통고하는 한 격서문을 삼가 보내드리오니 혹시 물리치지 아니하고 신문에 기재하여 널리 유포하여 주심은, 이는 곧 군자의 재량에 달렸습니다. 여러분 밝게 살피시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신문을 통해 대내외에 호남 의병의 거병을 알리고, 전국민에게 일제에 항거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삼연은 500여 명에 달한 의병을 소수의 유격대로 편성하고, 1907년 10월 21일 영광과 고창을 잇는 전선을 절단하기 위해 전주에 들어가 일진회원 1명과 철도교원 1명을 처형했다. 수연산에서 고창 문수사로 진을 옮기고 박영건, 정원숙 등의 권유로 일본군 5~6명을 사살했다.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해 김용구, 김엽중, 김익중 등에게 전투 준비를 지시했으며, 때마침 그를 돕겠다고 장정들이 찾아왔다.

찰흑 같은 밤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일본군이 기습 공격을 해왔으며, 정규 훈련을 받지 못한 의병들 일부가 흩어지기 시작하자 찾아온 장정들이 큰소리로 격려하며 직접 총격전을 벌였다. 삼연은 성문 위에서 지휘하며, 이를 모두 지켜봤다. 일본군이 5~6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하자 삼연은 그를 찾아온 장정 대표를 만났다. 찾아온 이는 함평에서 거병한 김준(자는 태원)이었다.

삼연은 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해 대장에 자리하고, 참모에 김엽중, 김봉수, 종사에 김익중, 서석구, 전수용, 이석용, 선봉장에 김준, 중군에 이철형, 후군에 이남규, 운량에 김태수, 총독에 백효인, 감기에 이영화, 좌익에 김창복, 우익에 허경화, 포대에 김기순 등을 임명했다. 의병 수는 1,000여 명에 달했다.

삼연은 문주사에서 왜적을 물리친 후 다시 고창 덕산으로 군진을 이전해 대오를 정비했다. 그는 전국에 “궁벽하고 먼 고을에는 기회를 보아 일제를 토벌하고, 도시에서는 힘을 합해 함께 멸하자”는 격문을 보내고, “군사와 백성이 왜놈의 머리 1개를 베면 100냥을, 순검이나 일진회원이 왜놈 머리 1개를 베면 죄를 용서하고 2개를 베면 돈 100냥을 주겠다”고 고시했다. 이를 수 만장 인쇄해 각 고을에 붙이도록 하고, 왜놈 앞잡이에 대한 응징도 천명했다.

삼연은 고창 분파소 내 일본군이 40여 명에 불과하다는 첩보를 듣고 고창성 입성을 결정, 20여 명을 살상하는 큰 승리를 거뒀다. 고창 내 일본군 병기고를 접수해 서양총을 선봉장 김준에게 전달하며 승리를 만끽한 의병들은 푸짐한 음식과 술까지 마시는 실책을 범했다. 야밤에 일본군이 기습 공격에 나서면서 시가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날이 밝으면서 제정신을 차린 의병들은 공격을 계속해 일본군은 20여 구의 시신을 남기고 5시간만에 철수했지만 종사 김익중과 의병 2명도 숨졌다. 삼연은 고창을 나와 장성으로 향했는데, 이 때 삼연을 따르는 의병은 20여 명에 불과했다. 후군장 이남규가 고창 용두촌에서 붙잡히는 등 대오가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장성 수연산에서 대오를 정비한 삼연은 백양사에 진을 치고 일본으로 가는 수백석의 쌀이 있는 영광 법성포 공격을 모의했다.

논의 끝에 장성에 있는 일본군을 먼저 치기로 한 삼연은 둘째형인 량연에게 이를 미리 알리고, 흩어진 포수와 병기를 점검해 1907년 11월 20일 공격에 나서 장성분파소를 붙태우고, 우편취급소에 쳐들어가 소장을 처형했다. 광주 주둔 일본군이 백양사를 덮쳤으나 이미 장성군 삼서면으로 진을 옮겨 피했으며, 12월 5일에는 영광의 방어선이 두텁자 법성포를 공격해 13명의 사상자를 내고 무기를 회수했다.

고창을 거쳐 장성에 이르러 일본군 소부대와 우연히 만나 접전 끝에 20여 명을 사살하고 수십정의 총기를 획득하는 전과도 올렸다. 추위 속에 군량과 의복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본군이 또다시 백양사를 기습, 대치하다 30여 명을 사살하기는 했으나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삼연은 고창 입암산성으로 진을 옮겼다. 또 내부 논의를 거쳐 작은 부대로 나눠 유격전을 펴기로 하면서 호남창의회맹소 의병의 무대는 함평, 광주, 장성, 담양, 고창, 무안 등으로 분산됐다.

1907년 12월 추위와 사기 저하 등으로 의병 몇몇이 도망치는 등 어려움에 처하자 경고문을 써 각 고을에 보내기도 했다. 왜적에게 기밀을 누설하는 간악하고 교활한 상인이 부정하고 교묘한 물건을 매매하는 것 등에 대한 경고였다. 같은 해 12월 22일 영광 공격을 위해 행군하다가 현재의 영광군 모량면 삼학리 한 주막에서 일본인 순사 후쿠다를 습격했다. 그러나 후쿠다가 도망쳐 영광 일본군 수비대장 하세가와에게 의병 행군 사실을 알리면서 반격을 받았다. 총격전 속에 삼연은 퇴각하고 선봉장 김준이 돌아오는 길에 함평주재소를 기습해 일본 순사 2명, 우편취급소장 등 3명을 사살했다.

기삼연은 1908년 2월 3일 일본군에게 붙잡혀 광주공원 앞 광주교 밑에서 처형됐다. 버려진 시신은 광주 선비 안규용이 관을 갖춰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1908년 1월 22일 기삼연과 김준, 김준의 동생 김율 등은 4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함평주재소를 다시 기습해 8시간의 총격전 끝에 일본인 순사 2명을 처형했다. 이후 수연산으로 돌아온 삼연은 광주 공략 계획을 세웠으나 때마침 발에 동상이 걸려 치료에 들어갔다. 잇따른 승전 소식에 의병수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으며, 광주의 관찰부 관리 최상진과 담양 관리 정상완 등이 사람을 보내 군자금 수만량을 협조하겠다고 약속해왔다. 이들이 내부에서 응해 광주와 담양을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관찰사 신응희가 최상진과 정상완을 다른 곳으로 발령내면서 차질을 빚었다.

춥고 끼니조차 거르면서 의병들의 고생은 날로 커갔다. 1908년 1월 26일 일본군은 담양 금성산성의 의병들을 기습했으며, 삼연은 아픈 다리를 끌고 선봉에 섰다. 김봉수, 유인수, 김익병 등에게 부대를 지휘하게 한 뒤 끝까지 버틸 것을 다짐한 삼연은 일본군의 구원병이 도착하면서 완전 포위된 상황에 몰렸다. 27일까지 계속된 총격전에 일본군 100여 명, 의병도 30여 명이 사망했다. 밤이 되자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안개가 추월산을 덮치면서 삼연은 “하늘이 우리에게 길을 터주는 것”이라고 말한 뒤 김용구를 불러 함께 북문으로 나가 무사히 성에서 벗어났다. 순창군 복흥면 사창리로 진을 옮겼으나 삼연은 다리 동상이 심해져 걷기 어려워지자 김용구에게 의병을 맡겼다. 그는 의병들에게는 음력 정월 보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인근에 사는 6촌 아우 구연의 집에 머물렀다.

1908년 2월 2일 음력 설 아침상을 받으려던 삼연에게 일본군이 들이닥쳤고 삼연은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선봉장 김준이 창평 무동촌에서 일본군 요시다를 죽이고 잔적을 쫓다가 삼연의 체포 소식를 듣고 경양방죽까지 추격했으나 닿지 못했다. 삼연은 체포된 지 하룻만인 1908년 2월 3일 아무런 재판 절차도 없이 광주천의 현재 광주교 밑에서 처형됐는데, 당시 “출사해 이기지 못하고 먼저 몸이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라고 유언을 남겼다. 광주천에 버려진 시체를 광주의 선비 안규용이 관을 갖춰 광주 서탑에 가매장했는데 이 때 일본인이 나무비에 ‘호남의병장 기삼연’이라고 썼다고 전해진다. 이후 기삼연은 종손자 기산도에 의해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보용산으로 이장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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