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들 - ① 송사 기우만
2021년 11월 19일(금) 04:00
을미사변·단발령에 격분…벼슬 물리치고 호남 최초 거병
조선 말 대학자 노사 기정진 손자·기만연 셋째 아들 장성서 태어나
일제 민비 살해 항거 이불 대신 거적 덮고 머리맡에 칼 두고 잠들어
1896년 200여명과 함께 나주 의병 합세 호남대의소 대장에 추대
을사오적 암살 사주로 왜경 심문…64세에 ‘호남의사열전’ 저술

장성향교의 전경. 기우만은 장성군 장성읍 성산리에 있는 향교의 명륜당에서 격문을 내고 의병을 모았다. 나중에 의병진을 광주로 옮겼다.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더 ‘외로운 전쟁’을 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택, 전수용, 이기선,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콘텐츠별로 재정리한 임진왜란·병자호란 의병장과는 달리 한말 의병장에 대해서는 개개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광주일보 의병열전’의 내용을 축약해 알기 쉽게 구성할 예정이다. 100여 년 전 호남의 한말 의병장들의 생애와 전적, 체포 이후 행적 등에 대해 지역민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말의병은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일어나 1910년 경술국치에 이어 1915년까지 20년간 저항을 계속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기간이 길었고, 전개과정도 복잡다단했다. 사상적 배경은 19세기 후반 외세에 의한 강제 개항 전후 대두된 위정척사(반침략ㆍ반외세의 정치사상)였다. 유교적 전통 질서를 고집한 유생과 구지배관료들이 주도했으며, 주체성과 정통성의 위기에서 민족의 자주와 국가의 수호는 항일에 있음을 적시했다. 이항로, 최익현, 기정진, 유인석, 기우만, 노응규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동학의 반봉건운동 및 항일구국운동과도 일맥상통하며, 동학의 잔여 세력이 의병에 가담하며 투쟁은 더 가열차게 전개됐다.

시기별로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의한 을미의병(1895), 이후 을사의병(1905), 고종 강제 양위와 군대 강제해산에 의한 정미의병(1907), 한일병합 직후 경술의병(1910~1915)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을미의병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충북 제천의 유인석이었으며, 관군의 해산 종용과 일본군의 증원 파병으로 패배했다. 호남에서는 장성 기우만이 기치를 올렸다. 하지만 대의와 명분, 사명감만으로 실전에서 성공하기란 극히 어려웠다. 을미의병은 향후 50년간 전개된 항일민족운동사의 방향과 정통성을 정립했다는데 의의가 크다. 후기 의병, 3·1운동, 상해 임시정부, 광복군 등이 이를 이어받았다. 한말 의병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정미의병은 군대 해산 후 관군이 참여하면서 무기를 갖추는 등 군사력이 향상됐다는 특징이 있다. 경술국치 전후 1915년 경술의병에서는 그 활동 무대를 국내에서 국외로 옮기는 양상이 나타났고, 의병장 전사나 체포로 인해 부대가 소규모로 재편성됐다.

국내 의병은 1909년 일제의 남한대토벌로 크게 위축됐다. 1908년 전국에서 의병의 교전 횟수는 1,976회, 의병 수 8만2,767명이었으나, 1909년 1,738회 3만7,593명, 1910년에는 128회 1,832명으로 급감했다. 교전 횟수 측면에서 호남 의병의 비중은 1908년 전국의 25.0%, 1909년 47.3%였으며, 교전 의병의 숫적 측면에서는 1908년 전국 24.7%, 1909년에는 60.1%에 달했다. 1908년을 기점으로 항전의 중심이 호남으로 옮겨진 것을 의미하며, 일제의 1909년 9월 호남 의병을 대상으로 한 남한대토벌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특히 호남에서는 고광순·김동신(지리산), 김준(어등산), 전해산(석문산), 기삼연(수록산), 안규홍(동소산), 박평남·심남일(영암 국사봉) 등이 험준한 산악을 배경으로 일제와 처절한 전쟁을 치렀다.

기우만의 조부인 노사 기정진이 1878년 설립한 고산서원의 전경.
송사 기우만은 을미사변에 격분해 한말 호남에서 가장 먼저 거병한 의병장이면서 호남 의병의 첫 조직체인 호남대의소의 대장을 지냈다. 1846년(헌종 12년) 8월 17일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대학자 노사 기정진의 손자, 기만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5세에 글짓기를 시작, 25세에 사마시, 29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34세의 나이에 별세한 조부 기정진을 위해 광사유집을 간행하고, 37세 때는 익릉참봉에 제수됐으나 사양했다. 49세에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들이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1895년 10월 8일 일어나자 이불과 요를 치우고 거적를 깐 뒤 머리맡에는 칼을 두고 잠들었다.

그의 울분은 같은 해 11월 15일 단발령으로 폭발했다. 당시 고종이 일제의 강요로 머리를 깎았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특히 충북 제천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유인석이 1896년 2월 11일 전국 각 도의 읍시가지에 격문을 보내자 기우만도 거병을 결심했다. 1896년 2월 나주 관찰부 참사관 안종수가 관원과 백성들의 머리카락을 자르려다 저항이 거세졌으며, 해남군수 정석진, 담양군수 민종열 등이 창의기를 세우고 안종수 처단에 나서기도 했다. 기우만은 3월 광산의 향교에 들어가 의사들을 모아 규율을 정하고 전략을 논의하기 시작했으며, 나주의 소식을 듣고 안종수의 10가지 죄를 열거해 알렸다.

나주 의병은 이학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는 한편 기우만에게 합세를 제의했다. 이에 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기주현, 김익중, 양상태, 기동관, 고기주, 이승학, 기동준, 기재, 기동로 등 의사 200여 명과 나주로 향했다.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인 김천일의 사당에 제문을 바친 뒤 금성산을 향해 위국토적을 맹세했다.

나주에 내려와 있던 승지 박창수의 격려를 받은 우만은 호남대의소의 대장으로 추대됐다. 이 같은 사실을 곳곳에 알렸으며, 왕에게 상소를 올려 선유사(나라에 병란이 있을 때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백성에게 훈유를 알리던 임시 벼슬)를 보내 의병을 해산시키려 한 왕의 처사를 통렬히 비난했다. 이어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낸 뒤 광주에서 모이기로 약속하고 본영을 광주 광산관으로 옮겼다.

그러나 고종은 의병의 자진해산을 위해 신기선을 호남에 선유사로 보냈으며, 기삼연 등의 극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우만은 의병 해산을 선언했다. 귀가한 그는 계속 상소를 올려 고종을 설득했으며, 1896년 9월 장선군 진원면 삼성산 골짜기 삼산재에 정자를 짓고 울분을 달랬다. 당시 삼산구곡, 가훼악부 등의 시를 남기기도했다. 1897년 10월 황제 즉위식을 한 고종이 민비를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하자 우만은 삼성산 꼭대기에서 망곡례(조선시대 국상이나 국기일에 직접 가지 못해 그곳을 향해 슬피 곡을 하며 지냈던 의례)를 올렸다. 신기선의 추천으로 여러 관직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상소를 올려 사퇴하고, 글을 쓰면서 소일하다가 1902년 다시 거병하려 했으나 사전에 탄로나 전주진위대에 체포되면서 무산되는 등 우만의 항거는 계속됐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면서 이완용 등 을사오적과 일제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우만 역시 면암 최익현과 함께 상소를 올리며 반발했다. 최익현, 노백 정재규 등이 현재 충남 논산의 궐리사에서 모임을 갖기로 하자 남원, 곡성 등의 지방 선비들에게 참여를 권하고, 우만은 제자 정시매를 보내 참여했다. 1906년 1월 22일 경기도 평택에 모여 서울로 올라가 대궐에서 상소 투쟁을 하기로 했으나 일본의 감시로 실패하고 다시 곡성 도동사에 모일 것을 약속했다. 이마저도 어렵게 되자 기우만은 곽진호의 도움으로 무안을 통해 청나라로 가려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돼 가지 못하고 광양에 은거하다 1906년 9월 20일 백낙구, 고광순, 이항선 등 50여 명과 거병했다. 하지만 광양을 거쳐 순천으로 가던 중 왜적에게 붙잡혔다.

우만은 음력 10월 17일 광주경무서로 압송됐는데, 심문하는 왜경에게 백립(하얀갓)을 쓴 채 쩌렁쩌렁하게 호통을 쳤다. 그는 민비 장례식 이후 10년째 백립을 쓰고 다녔다. 호남의 이름 있는 선비로 알려져 경무국장과 고급 관리가 우만을 찾아왔는데, 왜경이 백립을 벗으라고 하자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며칠동안 심문을 받고 석방된 우만은 두문불출했으며, 1907년 순종이 즉위하자 녹천 고광순, 성암 김상기, 금포 이항선 등이 찾아와 지난 1906년 순천에서의 패배를 설욕하자고 했으나 후일을 기약했다.

당시는 일제의 진압작전으로 의병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된 시기였다. 태인의 최익현, 홍천의 민종식 등이 체포됐으며, 신돌석 의병군은 해산됐다. 순천 낙안의 나인영, 강진의 오기석, 담양 창평의 이광수, 구례의 이기, 광주의 최동식, 장성의 기산도 등이 무기와 폭발물을 구입해 동지들을 모았고, 강상원, 황화서 등은 신비단이라는 암살단을 조직해 을사오적 중 내부대신 이지용과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폭탄물을 보냈으나 탄로나 실패했다. 1907년 3월 을사오적과 통역 박용화를 폭살할 계획을 수립해 18명이 6개조로 나눠 1조가 대신 1명을 맡았으나 통역 박용화만 살해하는데 그쳤다.

장성향교 앞의 오래된 비석들.
이와 관련한 조사에서 강상원이 기우만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3월 12일 우만은 영광경찰서에 잡혀갔다가 3월 17일 광주경무소로 다시 압송됐다. 그날은 장성군 삼계면 장날이었는데, 끌려가는 우만을 보고 주민들은 장을 파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3월 25일 왜경들은 우만을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영산포에서 목포로 이동하는데, 그 때 아들 낙도와 숙도, 조카 근도, 제자 안규용 등이 뒤를 따랐다.

4월 1일 목포를 출발해 4월 5일 서울에 도착한 우만은 4월 9일부터 왜경의 심문을 받았다. 오적 암살을 사주하려했다는 진술을 받기 위해 강상원과 대질 심문까지 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왜경은 4월 20일 우만을 석방시켰다. 이 때 왜경이 기차로 귀가할 것을 권했으나 거부하고 걸어서 고향인 장성으로 향했다. 충남 청양군 장구동에 이르러 최익현(의병을 이르켰다가 패하고 대마도로 붙들려가 단식한 끝에 1906년 11월 17일 74세 나이로 별세)에게 제문을 지어 곡했다. 귀가한 후 64세 때인 1910년 ‘호남의사열전’을 저술했다. 1910년 8월 강제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자 토굴을 파고 들어가 외부와의 교류를 단절했다. 그는 1916년 10월 28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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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 정사제 14대 후손 정상호씨는 광주일보 6월 25일자 22면 오봉 정사제의 생가터와 관련된 언급에 대해 “200여 년된 고택을 앞기둥을 바꾸고 지붕개량을 해 기와를 올린 옛집이며, 자신이 지금도 거주하고 있음”을 밝혀왔습니다. 또 “정사제의 유적은 120여년된 사당 오봉사가 있으며 선생의 초혼장 묘아래 의마총과 의노(보리쇠)무덤이 나란히 있어 관리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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