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과 단절, 별을 올려다보는 밤-이강선 호남대 교양학부 교수
2021년 11월 01일(월) 04:00
우리는 빛 속에서 살고 있다. 별빛도 그러하다. 낮이건 밤이건 별빛을 받고 있으나 우리가 별빛을 느끼는 때는 오직 밤뿐이다. 더 정확히 말해 밤은 태양빛을 가림으로써 별을 올려다볼 기회를 제공하고 별이 거기 있음을 느끼게 하는 조건을 제공한다.

주변의 온갖 소음에서 단절되었을 때 느끼는 음악이 특별하듯,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인공의 빛들로부터 내 의지로 벗어나 하늘의 별로 주의를 돌렸을 때 느끼는 감동은 특별하다. 단절은 곧 집중이다.

단절하면 집중하는 대상은 선명해질뿐더러 몹시도 빛난다. 선은 놀라울 정도로 명확해지고 음영이 짙어지며 색채는 단일하지만 찬란해지는 동시에 다양하게 일렁거리니 집중의 의도는 바로 거기에 있다. 하나를 제대로 깊이 자세히 온전히 보려는 것. 망원경은 그런 의도를 정확히 충족시킨다.

최근 천문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마지막 행사가 별 보기였고 일행은 옥상으로 이동했다. 밤이 내린 옥상은 단조로웠다. 로봇처럼 보이는 망원경만 몇 대 보일 뿐, 다른 것은 없었다.

북쪽, 길 건너 아파트가 천문관보다 높았고 동쪽으로 상가 건물들이 보였다. 남쪽으로는 근린공원의 나무들과 건물들이 보였으니 결국 천문관은 평지,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관계자는 레이저 포인터를 사용해서 북극성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던 그 별, 인공의 빛이 하늘을 침범해 인간과 자연을 차단하기 전까지 인간들이 사막에서 바다에서 산에서 들에서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보며 방향을 잡았던 별. 그리고는 북두칠성.

다소 흐린 날이었다. 일행은 그가 가리키는 곳을 좇아 밤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그 빛의 끝을 올려다보았고 그것만으로도 뿌듯했는데. 마침내 진정한 놀라움이 왔다.

망원경 안을 가득 채운, 아니 초점이 맞는 순간 시야를 가득 채운 별. 별들은 찬란하다고 해야 옳았다. 그리스인들이 왜 별자리를 만들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그들은 신비를 보았던 것이다.

처음으로 목성의 네 위성을 보았다. 그리고 목성의 중심을 가로지른 줄무늬. 다음은 토성, 토성을 둘러싼 고리는 여느 보석 못지않게 찬란했다. 어디 그뿐이랴. 이중 성단. 올빼미 성좌, 마지막으로 달을 보았다. 달은 배구공만큼이나 컸고 껍데기 안에 전원이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투명했다. 달은 몸집 전체에 빛으로 된 줄무늬를 지니고 있었고 그 무늬는 군데군데 접점처럼 두텁게 빛났으며 그 안에 무언가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옥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주 어디인가에 있었다. 별을 올려다보고 사랑하고 절망하던 모든 이와 더불어 있었다. 그 세계에는 어린 왕자가 있는 사막이 있었고, 웃음소리 청량한 우물이 있었다. 베두인의 숨죽인 웃음과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던 아버지의 정원과 물안개 휘돌던 호수와 아득한 도시의 아침, 그 모든 것이 있었다. 비밀과 환상과 기억, 그리고 밤과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달에 분화구가 있고 토성에 고리가 있으며 목성에 네 개의 위성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일상은 그런 것들을 기억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별을 보기 위해 아이와 함께 천문대들을 좇아다니던 겨울밤, 영하 십 몇 도를 내려가는 추위에 꽁꽁 얼어서 유성우를 보겠노라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들. 모임 내 천문학자의 지시를 따라 목성과 토성을 올려다보던 추석 무렵도 일상에 묻힌다. 그런 순간들이 다시 별을 올려다보는 순간 튀어나온다.

그 밤의 별은 존재에 대한 소망에 물을 부었다. 아직은 살 만한 삶이라는 소망에 희망을 부어 넣었다. 때로 단절은 삶을 무한히 풍성하게 해준다. 별을 들여다보던 그 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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