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에 한글을 생각하는 이유-배동진 전 전남도 교육지원과장
2021년 10월 07일(목) 07:00
한글은 소리글자로 문자를 만든 역사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이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뛰어난 글자다. 그런데도 신문·방송은 물론 시민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일제 강점기 시절 강요당한 일본어는 물론 영어, 외국어가 난무하고 있다. 정부는 문화관광부와 국립국어원 조직을 두고 관련 법률을 만들어 공문서 등에 한글을 쓰도록 하고, 언어의 특성상 한글을 고집할 수 없기에 외래어를 합리성 있게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도 무문별한 외국어 사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한글은 1443년에 만들었으니 올해로 578년이 되었고, 반포한 지는 575년이 되었다. 세종대왕은 올바른 정치를 펴고, 백성과 소통하기 위해 갖은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 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훈민정음)를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큰 획을 긋는 아주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세종은 집현전이란 전담 기관을 두고,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해 신진 학자들을 투입했지만 관료 집단의 반대가 끈질기게 이어졌다. 자신을 비방한 한글 벽보 사건을 계기로 연산군은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허균 등 선각자들이 한글로 글을 썼고 백성들도 면면히 한글을 사용해 왔다.

조선 말기 외세가 조선을 침략하려고 하던 시기에 자주의식을 함양하고, 백성을 교화해 나라를 새롭게 만들기 위해 독립협회 등이 한글 사용·보급에 앞장서면서 한글 사용이 대중화되었다. 그런데 훈민정음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세종조에 ‘신미대사를 궁궐로 불러 들여 극진히 대접했다’는 단 한 줄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필자는 우연히 ‘복천암실기’라는 책을 읽고서 한글 창제에 관해 소상히 알게 되었다. 당시 집현전 학사인 김수온은 속리산 복천암에 계셨던 자신의 형님인 신미 스님이 여러 나라 말을 잘 하기에 이를 세종에게 알렸고, 세종이 신미를 만나 임무를 부여했다. 세종은 신미가 서울의 흥천사, 대자암 등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온갖 편의를 제공해 주었고 그 덕분에 한글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태생적으로 불교를 억압했고, 스님들을 천민으로 격하하고 유교를 내세웠다. 따라서 훈민정음을 만든 주역이 신미, 학조, 학명 등 스님 천민들이니 양반 관료들의 반발은 불 보듯 뻔한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만든 과정이나 만든 사람들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훈민정음 제작에 참여한 이들은 집현전 학사들이 아니라 당시 세자였던 훗날 문종, 수양대군, 공주 등 왕족과 신미를 비롯한 학조, 학명 등 스님들이었다.

훈민정음 제작에 참여한 이들이 집현전, 정음청 등 양반 관료였다면 역사서에 당연히 훈민정음을 만든 과정, 만든 사람들을 밝혀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박해하고, 천민 노예로 격하한 이들이 만든 훈민정음을 역사에 기록할 수 없었고, 한문 대신 훈민정음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양반 관료들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면 훈민정음을 만들고 나서 그들이 신성시하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유교 관련 책을 최우선으로 번역했을 것이나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 불교계 책을 번역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래 전에 그 역사적인 현장인 속리산 법천암을 찾아가 한글 창제 관련해 흔적이 있나 살펴 보았는데, 어느 곳에서도 짧막한 설명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산을 내려왔다. 훗날 영화 ‘나랏말싸미’가 상영됐고, 정찬주 소설가는 어느 날 속리산 법천암을 들렀을 때 주지스님으로부터 한글 창제에 관련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천강에 비친 달’이라는 소설을 썼다.

문제는 정부나 국문학을 전공한 이들, 심지어 역사학자들도 이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을뿐더러 새롭게 드러나는 한글 제작에 관한 것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한글은 문자를 만든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로 소중하고 귀한 자산이다. 만일 한글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곤 한다. 자기 자신의 말과 글자가 있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자 자랑이다.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한류 문화에도 한글이 기여한 바 적지 않으니 우리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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