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군맹상평’(群盲象評)을 경계하자-정인채 대한건축사협회 광주시건축사회 회장
2021년 07월 30일(금) 05:30

정인채 대한건축사협회 광주시건축사회 회장

근래 TV에서는 건축가들이 다양한 모습의 주택을 탐방하거나 새롭게 리모델링한 연예인의 집을 탐방하는 프로들이 자주 방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친환경 건축이나 좋은 도시 공간에 대한 특집 방영도 늘고 있다. 이는 건축에 대한 인식 변화와 함께, 건축이 삶 문화의 중심이라는 점을 공유하면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의미다.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다. 건축의 가치는 건축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요소와 관점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형성된다. 거시적으로는 사회적 상황이나 경제적 수준, 삶 문화에 대한 지향성이 영향을 준다.

거기엔 건축비를 책임지는 건축주의 요구와 법과 제도를 운영하고, 건축 관련 정책을 만드는 행정의 관점도 있다. 특히 행정은 건축 높이의 규제 등 넓은 권한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다양한 요소화 관점이 반영되어야 거주지와 지역·환경에 공헌하는 좋은 건축이 된다. 이를 총괄하고 창조적으로 융합하는 일을 책무로 하는 것이 건축사다. 그래서 문화도시라고 하는 외국의 선진 도시들에서는 행정은 물론 시민들도 건축사를 도시 문화를 창조하는 한 축으로서 대접을 한다.

그러나 필자가 건축 설계를 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는 건축사에 대해 문화적 대접이 낮다는 것이다. 특히 행정이 그러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여기에는 건축사의 책임도 있지만, 건축을 바라보는 행정의 ‘군맹상평’(群盲象評)의 시각도 있다.

‘군맹상평’이란 맹인(盲人) 여럿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으로, 자기 주관과 좁은 소견으로 그릇 판단하고 정책을 결정한다는 의미의 고사성어다. 건축사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힘들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건축 심의인데, 심의가 군맹상평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한 개의 건축물이 설계되고, 허가되기까지는 여러 단계의 심의를 거친다. 도시계획 부서에서는 도시계획 심의가, 경관 부서에서는 경관 심의가, 공원 부서에서는 공원 심의가, 건축 부서에서는 건축계획 심의가 이루어진다. 거기에 친환경 인증, 무장애 인증 등도 있다. 건축물의 규모나 용도에 따라서는 심의 단계가 더 추가되기도 한다.

경험을 통해서 보면 행정 부서별로 이루어지는 여러 단계의 칸막이식 심의가 좋은 건축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동일한 사안이 겹쳐 심의되면서 그 내용이 각기 다르고 정합성을 갖지 못하여 건축사가 어느 심의를 따라야 하는지 당황하는 경우도 많다. 군맹상평식 심의 때문이다.

최근 어떤 광역 지자체에서는 여러 단계의 심의를 통합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진일보한 행정이라고 생각한다. 심의 내용에도 그러함이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자체들은 구체적인 디자인 가이드라인 없이 건축설계를 하고, 심의를 한다. 그래서 예측 가능한 설계나 심의가 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설계나 심의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건축사들은 건축설계를 심의위원들이 한다는 자조 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근래 어떤 재개발사업에서 건축물 철거 과정에 아픈 일이 일어났다. 건축을 설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우리들은 책임을 느끼고, 반성하며,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깊은 애도를 표한다.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새로운 각오를 한다. 행정도 이러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발 빠르게 제도적 보완 장치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들 보완 장치가 현장 실태 파악을 전제로 한 것인지 의문이다.

특히 철거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건설회사, 철거업체, 감리자, 공무원의 역할과 책임을 파악한 후에 제도적 보완을 한 것인지 의문이다. 해체 감리를 경험한 어떤 건축사는 이번 결정을 현장 여건과 실태를 고려하지 않은 탁상공론 혹은 땜질식 대책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관련 기관과 전문가들과의 충분한 소통과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은 권위적이고 행정 편의적인 대안이라고 말한다.

현대사회는 다양하고 다중적인 사회이다. 과거처럼 행정의 시각만으로 정책을 결정하기가 어려운 시대다. 그래서 다양한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귀중하게 듣고 결정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자자체들은 여전히 이를 무시하거나 형식적인 절차로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정책 결정 후에 형식적인 의견수렴 절차를 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들은 개선되어야 한다.

건축사들은 사회나 행정에 자기 견해를 적극적으로 말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좋은 건축을 위해서는 의사 개진에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우리 도시는 문화도시답게 그간의 분업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군맹상평적 칸막이식 관점에서 벗어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이를 통하여 다른 도시들을 선도해야 한다. 그래야 문화도시 이미지도 강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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