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코로나의 나날- 수필가 황옥주
2021년 07월 21일(수) 05:00
수난의 세월이 너무 길다. 늙마에 어쩌다 이렇게 긴장하며 살아야 하나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원래가 내풀로 살 수 없는 인생이지만 이건 아니다.

백신접종만 마치면 코로나의 걱정에서 자유로울 줄 알았다. 허나 갈수록 태산이다.

뭔지는 몰라도, 델타·감마·람다 변이 등이 불안을 돋우더니 최근 확진은 거의 델타 변이라 한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뒷뉘’다. 어떤 변이가 또 출현할지 지레 겁부터 난다.

연금 덕에 쌀 걱정은 모르고 산다. 배고픔처럼 큰 서러움은 없는데 이만하면 상팔자인지 몰라도 신나는 날이 없다. 맛문한 삶에 발걸음이 휘청댄다. 언제, 어디서가 두려워 방안퉁소 신세다. 뒹굴다 낮잠 자다 하루가 간다.

더러, 독서나 하겠다는 각오로 책을 사들인다. 새 책을 펼 때만 뿌듯하고 막상 읽으려면 글구멍이 막혀 헛수고다. 서문만 읽고 덮어버린 책도 있다. 어수선한 방바닥에 제목도 잊어버린 새 책들이 쌓여간다. 코로나와 독서가 무슨 상관일까만 무기력에 빠진 내 탓은 없고 코로나 탓만 있다. 주변만 더 어수선해져 미욱한 사람은 이래서 딱하다.

사람의 확실한 생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미래는 미지의 세계다. 위대한 포부를 품은 듯한 ‘내일’ 운운은 무능한 자기변명이다. 허나 지금은 ‘내일’이 희망이고 답이다. 개인 의지 밖의 세상살이다. 이런저런 변이가 백신도 뚫어 버린다. 크로나19의 차꼬를 풀 열쇠가 아닌 것이다. 언젠가는 다스려질 일이지만 기다림이 너무 지루하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다림으로 시작하여 기다림으로 끝난다. 기다림의 처음은 어머니의 젖이었을 것이다. 생득적 터득이 아니라 살기 위한 본이다. 기다림은 무엇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기대다. 보람과 희열은 순간이고 다음 문제다. 끝 모를 욕망이다.

간간히 오후 늦게 제석산에 오른다. 숲속이 설마 인간세보다 두려우랴 싶어서다. 코로나 세상에도 해넘이는 아름답다. 모경은 하루의 마지막에 핀 꽃, 어둠이 삼켜버릴 직전의 삭연한 그림이다.

이때쯤이면 흥룡사 종성이 울린다. 불교에서 범종소리는 부처님의 음성이라며 ‘종소리’라 하지 않는다 한다. 33번 모종 울림을 선 채로 헤아리며 마지막 여운이 자자질 때 공연히 울컥하기도 한다. 나만의 감정일까. 귀소 하는 새들의 울음소리와 어울릴 때면 더 그렇다.

모경과 모종, 하루의 아쉬움은 저녁노을에 있고 일 년의 아쉬움은 세모에 절실하다는 말에 실감한다. 어느 내일, 약약한 마스크를 벗을 날이 희망이다. 내 인생의 뒤안길을 더듬어본다. 보람줄, 갈피끈을 넣어둘 만한 시절도 있었으리. 글을 쓰면서 늘 조마조마했다. 알갱이 빈 개소리괴소리가 아니기를….

다시 시작이다. 일체는 마음먹기다. 하(何) 시절에 먹구름이 걷힐지 요원하지만 느슨해진 마음을 추슬러볼 테다. 기다림이 너무 지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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