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시대, 청년을 살려야 국가가 산다-변길현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관
2021년 07월 12일(월) 22:45
젊어서 죽은 시인이 있다. 기형도.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어려운 가정 형편을 딛고 명문 대학을 나와 중앙 언론사를 다니면서도 시인을 꿈꾸었고, 종로의 B급 심야극장에서 새벽에 청소부에 의해 죽은 채 발견되었던 시인. 손에는 소주 한 병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1989년. 사인은 뇌졸중. 향년 29세. 나름 성공한 삶이었음에도 그 시대의 우울과 비관을 담았던 시인. 생각해 보니 20대에 시인이 되기를 꿈꿀 수 있었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1980년대는 군부독재에 저항한 죽음의 시대였다. 윤상원·박관현 열사는 불과 서른 살 남짓의 나이에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후 광주의 비극과 항쟁 내용이 전국에 알려지고 1990년대 초까지 전국의 많은 대학생들이 자기 한 몸을 바쳐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였다. 한국은 이러한 열사들의 희생으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쟁취한 민주주의를 누리는 나라가 되었다.

시간이 꿈결같이 흘렀고, 이제 한국은 전 세계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곳 중 하나가 되었다. 2021년 한국은 미국 언론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순위 8위를 기록하였고, 선진국 그룹인 G7에 초청되어 주요 선진국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한국 보이 그룹이 빌보드 차트 1위가 되어도 놀랍지 않고, 선진국 출신의 외국 청년들이 한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한국에 살아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최근 유엔무역개발회의는 한국을 개도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하였다. 우리는 진짜 선진국인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 시대의 개막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20·30대들은 20세기 젊은이들이 꿈꾸었던 민주주의나 정의, 시와 예술 대신 취직·거주·결혼 같은 현실적 가치를 더 중시한다. 이것은 요즘의 젊은이들이 특별히 이기적이기 때문인가? 그들이 한국을 찾은 외국 청년처럼 개척 정신이 없기 때문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기성세대들이 구축한 한국의 민주주의와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적 요구를 하는 것이다. 사회에 진입하려는 청년들의 노력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달라는 정당한 요청이고 간절한 호소이다. 이 새로운 사회적 현상은 한국이 노력만 하면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고도 성장기를 거쳐, 이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자본에 기초한 세습적 신분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중 최근 나타난 ‘이대남’(20대 남자), ‘이대녀’(20대 여자)라는 신조어도 변화된 사회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예산이 현재 청년 계층에 투입되고 있는 것은 지금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현 정책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처방이기 때문이 아닐까? 일시적 기간제 근로자, 일시적 인턴, 일시적 지원금을 받고 인생을 설계할 수는 없다. 청년층이 원하는 것은 ‘시스템의 예측 가능성’ 내지 ‘공정성’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 사회에서 집을 살 수 없고, 직장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된다 한들 그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KBS에서 방영된 ‘2021 청년 고독사 보고서’라는 프로그램은 놀랍고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결과를 보여준다. 체납고지서와 이력서, 빈 술병과 라면, 쓰레기 등이 남겨진 청년 고독사의 현장은 그들의 죽음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청년 고독사 문제가 심각해지자 기동민 의원이 발의한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한국 역사상 최초로 지난 4월 시행되었다. 죽어서야 보이는 청년들을 위한 최초의 법률이다.

이제 명실상부한 선진국에 진입한 지금부터는 경제적 자립 기반이 없는 청년 계층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구조적 정책과 장기적 예산이 투입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1980·1990년대와 지금의 취업률이 다르니, 지금은 경제적 능력이 갖춰지지 않은 청년들이 기본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주택 제공, 취업 지원, 재교육 지원, 기초생활비 지원 등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보장할 때이다.

신혼부부에 대한 지원도 더욱더 강화되어야 한다. 가족생활을 할 수 있는 주택 제공, 육아 및 평생 교육비 지원, 출산 시 인센티브 강화 등이 놀랄 정도로 파격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 출산률 저하가 국가 경쟁력의 저하로 이어지는 이 시대에, 청년층의 고독사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는 이 시대에,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 국가 과제이다. 지금은 그대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물을 때가 아니라, 국가가 젊은 그대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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