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다가 무엇인고? -김요수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대외협력총괄단 위원
2021년 07월 11일(일) 23:10 가가
영어를 많이 섞어 쓰는 사람이 있다. ISP(인터넷 서비스 사업자)가 어떻고 RFP(제안 요청서)가 어떻고, 심지어 ‘그로테스크한 라이프’니 ‘저스티스는 낫씽이야’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토씨만 한글을 쓴다고나 할까. ISP가 뭐냐고 물으면 ‘그것도 몰라?’ 버럭 화를 낸다.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고, 토익 시험을 본 사람도 아니다. 높은 자리(?)를 맡고 있어서 어느 토론회에 나섰는데, 콩팔칠팔하는 바람에 그 뒤로는 부르지 않는다. 그는 지식을 뽐냈다고 느꼈겠지만, 의사 전달도 안 되고, 더 이상 밑천도 없다.
그가 자주 쓰는 말 가운데 어젠다(agenda)란 말이 있다. 어젠다는 회의를 할 때 의제라는 뜻이니까, 이야깃거리쯤이겠다. ‘나우, ? 유어 어젠다?’ ‘파이브 이어스, 유어 어젠다?’ 이렇게 자주 묻는다. 되지 않는 영어지만, 그걸 또 나는 알아먹고 그때마다 삶을 돌아보거나 내다보곤 한다. 내 삶의 이야깃거리는 매우 종요로우니까. 살면서 무엇이 이야깃거리가 될까? 직장을 얻어야 하는 사람은 ‘일자리’고, 안정된 일자리를 얻은 사람은 ‘집’이다. ‘돈’이 많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다. 아이를 키우거나 반려 동식물을 키우는 사람의 애틋한 어젠다도 있다.
일자리 때문에 학벌과 시험에 매달리고, 집 때문에 아파트와 인테리어에 관심을 둔다. 돈 때문에 땅과 주식이 관심거리다. 혼인과 육아에 관련된 행사가 열리고, 반려 동식물에 관한 정보 교환도 많다. 이 모두가 뉴스거리다. 뉴스가 이야깃거리(어젠다)인 셈이다. 어떤 뉴스는 우리의 입에 오르내리고, 술안주가 되기도 한다. 어떤 뉴스는 우리를 깨닫게 해서 실천하게도 한다.
그런데 뉴스를 외면하는 사람도 꽤 있다. 바빠서 그런다는 사람도 있지만, 내 삶과 먼 이야기라서 그냥 지나치는 뉴스도 있고, 얼토당토않은 뉴스도 있기에 그렇다. 무엇보다 보고 싶지 않은 뉴스가 많다. 권력의 갑질은 짜증 나고, 돈 앞에서 을질은 속상한다. 보이지 않는 폭력은 기가 막히고, 정치인의 말장난에는 화가 난다. 잇속을 챙기는 거짓말 뉴스를 보면 억울하기도 하다.
물론 갑질, 을질, 폭력, 말장난, 거짓말 때문에 ‘저렇게 나쁜 사람도 있으니 당하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모르게 남을 돕는 뭉클한 뉴스, 살맛 나게 하는 예쁜 뉴스에 더 마음이 간다.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착한 도전과 부지런 떠는 열정을 갖게 된다.
옛날처럼 뉴스를 기다리며 보는 사람은 이제 드물다. 언제든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 시스템의 변화도 한몫을 하고, 뉴스를 제목만 보고 골라서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목 장사’하는 뉴스도 있다.
뉴스거리는 기자가 고르고, 언론사가 내보낸다. 뉴스의 됨됨이(질)는 어쩌면 기자의 됨됨이, 언론사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하루 만에 뒤집히는 ‘하루짜리’ 뉴스도 있고, 일주일 만에 쓰레기 기사로 밝혀지기도 한다. 홍보하는 기사도 눈에 띄고, 언론사의 잇속에 따라 쓰인 기사도 있다.
뉴스거리를 관행에 따라서 정하기도 한다. 태풍이 불면 피해를 찾아 헤매는데, 뉴스에 원인은 빠진다. 선거가 닥치면 온통 후보자의 움직임으로 도배하는데, 정책은 없다. 뭔 장관이 들어서면 그를 이 잡듯 뒤지는데, 그의 사생활만 나온다.
어떤 뉴스를 만나느냐에 따라 투덜거리는 삶이 될 수도 있고, 긍정과 희망의 삶을 누릴 수도 있다. 뉴스를 보고 나서, 이 뉴스가 이 대목에서 왜 나왔을까? 이 뉴스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 기사는 무슨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가? 떠올려 봐야 한다.
뉴스를 보기에 앞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종요로운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무엇이고 앞으로 할 일은 무엇인가, 돌아봐야 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내 삶의 어젠다를 먼저 잡아 보는 게 좋다.
오늘 내 삶에서는, 내 조직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무엇을 어젠다로 삼아야 하는가, 한번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어를 많이 섞어 쓰는 사람처럼 부름을 받지 못하고, 콩팔칠팔하는 뉴스처럼 외면당한다. 내 삶을 얼토당토않은 뉴스에 파묻히게 할 수 없다.
물론 갑질, 을질, 폭력, 말장난, 거짓말 때문에 ‘저렇게 나쁜 사람도 있으니 당하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모르게 남을 돕는 뭉클한 뉴스, 살맛 나게 하는 예쁜 뉴스에 더 마음이 간다.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착한 도전과 부지런 떠는 열정을 갖게 된다.
옛날처럼 뉴스를 기다리며 보는 사람은 이제 드물다. 언제든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 시스템의 변화도 한몫을 하고, 뉴스를 제목만 보고 골라서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목 장사’하는 뉴스도 있다.
뉴스거리는 기자가 고르고, 언론사가 내보낸다. 뉴스의 됨됨이(질)는 어쩌면 기자의 됨됨이, 언론사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하루 만에 뒤집히는 ‘하루짜리’ 뉴스도 있고, 일주일 만에 쓰레기 기사로 밝혀지기도 한다. 홍보하는 기사도 눈에 띄고, 언론사의 잇속에 따라 쓰인 기사도 있다.
뉴스거리를 관행에 따라서 정하기도 한다. 태풍이 불면 피해를 찾아 헤매는데, 뉴스에 원인은 빠진다. 선거가 닥치면 온통 후보자의 움직임으로 도배하는데, 정책은 없다. 뭔 장관이 들어서면 그를 이 잡듯 뒤지는데, 그의 사생활만 나온다.
어떤 뉴스를 만나느냐에 따라 투덜거리는 삶이 될 수도 있고, 긍정과 희망의 삶을 누릴 수도 있다. 뉴스를 보고 나서, 이 뉴스가 이 대목에서 왜 나왔을까? 이 뉴스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 기사는 무슨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가? 떠올려 봐야 한다.
뉴스를 보기에 앞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종요로운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무엇이고 앞으로 할 일은 무엇인가, 돌아봐야 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내 삶의 어젠다를 먼저 잡아 보는 게 좋다.
오늘 내 삶에서는, 내 조직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무엇을 어젠다로 삼아야 하는가, 한번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어를 많이 섞어 쓰는 사람처럼 부름을 받지 못하고, 콩팔칠팔하는 뉴스처럼 외면당한다. 내 삶을 얼토당토않은 뉴스에 파묻히게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