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황옥주 수필가
2021년 07월 09일(금) 06:00 가가
눈, 차 등의 낱말이 ‘첫’이란 관형사와 어울리면 뭔가 느낌이 달라진다. 단지 ‘첫’자 하나가 덧붙여졌을 뿐인데 가까운 미래에 꼭 신나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설렘이랄까? 이런 변화의 인지를 단어도 생명력이 있다는 빙거(憑據)로 내세워도 좋을지 모르겠다.
‘첫’과 ‘사랑’과의 만남이 ‘첫사랑’이다. 듣기만 해도 심장이 달아올라 피돌기가 빨라진다. 겪어 본 사람은 미련이 많아 그렇고 귀로 경험한 사람은 환상 때문에 들뜬다.
사랑은 해변의 조수와 같다. 밀려갔나 싶으면 다시 몰려오고 머물 듯 미적대다 어느 순간 앵돌아져 빠져나간다. 허무해도 속절없다. 무상한 변덕을 겪고서도 속인들은 차마 그 끝자락을 놓지 못하고 번뇌한다.
하물며 첫사랑임에야! 사노라면 간혹은 옛 누구의 생각으로 효월사창(曉月紗窓)을 맞을 때가 있다. 오직 한 번뿐인 지고지순의 순정, 야생화 한 송이에 가슴이 떨리고 하늘 높은 줄도 몰랐던 게 첫사랑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영악한 눈이 열리면 첫사랑은 사라진다. 꽃반지의 감격도 설니홍조(雪泥鴻爪)다. 들꽃보다는 화원의 장미가 예뻐 보이고, 한 송이 보다는 두 송이 쪽으로 저울대가 기운다. 허기진 삶보다는 흔전거리는 생을 꿈꾼다.
언젠가 무등산 용추폭포 골짜기를 산행하다가 자갈밭 명경지수에 끌려 발길을 멈춰 버렸다. 중머리재의 재넘이가 시원했다. 막걸리 잔에 농이 짙어지고 마음의 빗장이 풀렸다. 누군가가 각자의 첫사랑 이야기를 풀어 보잔다. 목덜미 주름살은 오래전에 들킨 일, 새삼 쑥스러워할 처지도 아니었다.
잗다란 사연일지라도 남의 비밀이라면 목이 빠진다. 그렇다고 통째로 자신을 발가벗기는 쉽지 않다. 여자는 더 그럴 것이다. 자신의 흉을 털어놓지 않은 비밀은 비밀도 아니다. 사랑에는 상대가 있다. 치우친 자기 자랑으로 상처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호기심만 건드리다 싱겁게 끝나 버린 뒤에 과연 내게 첫사랑이 있기나 했었나 지난날의 편린들을 하나씩 뒤적여 봤다.
못다 한 얘기가 남았음일까? 초추에 떨어진 단풍 한 잎이 작은 소를 맴돌듯 청순한 한 중학생 소녀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추억의 메모리’란 인쇄물이 막무가내로 퍼지던 시절이었다. 누구와 교환하든 눈칫거리가 되지 않던 때라 숱하게도 주고받았다. 읽을거리가 귀한 시골, 자작 메모리 장을 모아서 읽어 보는 재미가 적지 않았다.
그녀는 오빠 언니의 책이라며 늘 새로운 시집이나 소설을 가지고 다녔다. 그걸 빌리자는 말을 터놓고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거리도 아닌데 남의 눈이 두려웠다. 쪽지로 전하려 해도 기회 잡기가 쉽지 않았다.
어설픈 고민 끝에 그녀 집 돌담에 우리만의 비밀 우체통을 만들었다. 못생긴 돌멩이가 자물쇠요 파수꾼이었다. 비로소 마음대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만날 때마다 그녀는 내게 유명 시인들의 시를 들려주기를 좋아했다. 명석한 두뇌에 암기력이 대단했다. 책을 교환할 적이면 언제나 그녀의 시(?)가 책 속에 들어 있었다. 내용은 차치하고 나는 그게 좋았다. ‘책을 바꾸자’는 것을 구실 삼아 만나려는 속내가 쪽지의 진실이었으리라.
자연히 어느 마을로 향한 내 발길이 잦아지고, 바람은 이런저런 소문을 나르고 있었어도 담벼락은 한 번도 쪽지의 비밀을 토해내지 않았다. 신의 있는 파수꾼을 둔 음전한 우체통이었다.
출향한 뒤, 가끔은 먼 하늘 저편에서 소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돌담 우체통도 그려졌다. 그게 사랑이라면 내 첫사랑은 싱거운 로맨스였다.
문학적 재능, 집념과 열정이 넘쳤던 그녀는 지금은 훌륭한 작가로 어딘가에서 주옥 같은 시들을 쓰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촌뜨기 이름은 예쁜 필명으로 바뀌었을 거고.
세월은 흘러가도 옛 생각은 남는다. 혹여 어느 시인의 눈에 이 글이 뜨일지 몰라 고비늙은 사람의 마음이 초조해진다. 휘휘한 달밤이면 혹여 나처럼 돌담 우체통을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한뉘 그러길 바란대도 새삼 이제 죄 되지는 않을 터, 남모르게 얼굴 붉히기에는 헛헛한 추억이다.
사랑은 해변의 조수와 같다. 밀려갔나 싶으면 다시 몰려오고 머물 듯 미적대다 어느 순간 앵돌아져 빠져나간다. 허무해도 속절없다. 무상한 변덕을 겪고서도 속인들은 차마 그 끝자락을 놓지 못하고 번뇌한다.
하물며 첫사랑임에야! 사노라면 간혹은 옛 누구의 생각으로 효월사창(曉月紗窓)을 맞을 때가 있다. 오직 한 번뿐인 지고지순의 순정, 야생화 한 송이에 가슴이 떨리고 하늘 높은 줄도 몰랐던 게 첫사랑이다.
잗다란 사연일지라도 남의 비밀이라면 목이 빠진다. 그렇다고 통째로 자신을 발가벗기는 쉽지 않다. 여자는 더 그럴 것이다. 자신의 흉을 털어놓지 않은 비밀은 비밀도 아니다. 사랑에는 상대가 있다. 치우친 자기 자랑으로 상처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호기심만 건드리다 싱겁게 끝나 버린 뒤에 과연 내게 첫사랑이 있기나 했었나 지난날의 편린들을 하나씩 뒤적여 봤다.
못다 한 얘기가 남았음일까? 초추에 떨어진 단풍 한 잎이 작은 소를 맴돌듯 청순한 한 중학생 소녀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추억의 메모리’란 인쇄물이 막무가내로 퍼지던 시절이었다. 누구와 교환하든 눈칫거리가 되지 않던 때라 숱하게도 주고받았다. 읽을거리가 귀한 시골, 자작 메모리 장을 모아서 읽어 보는 재미가 적지 않았다.
그녀는 오빠 언니의 책이라며 늘 새로운 시집이나 소설을 가지고 다녔다. 그걸 빌리자는 말을 터놓고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거리도 아닌데 남의 눈이 두려웠다. 쪽지로 전하려 해도 기회 잡기가 쉽지 않았다.
어설픈 고민 끝에 그녀 집 돌담에 우리만의 비밀 우체통을 만들었다. 못생긴 돌멩이가 자물쇠요 파수꾼이었다. 비로소 마음대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만날 때마다 그녀는 내게 유명 시인들의 시를 들려주기를 좋아했다. 명석한 두뇌에 암기력이 대단했다. 책을 교환할 적이면 언제나 그녀의 시(?)가 책 속에 들어 있었다. 내용은 차치하고 나는 그게 좋았다. ‘책을 바꾸자’는 것을 구실 삼아 만나려는 속내가 쪽지의 진실이었으리라.
자연히 어느 마을로 향한 내 발길이 잦아지고, 바람은 이런저런 소문을 나르고 있었어도 담벼락은 한 번도 쪽지의 비밀을 토해내지 않았다. 신의 있는 파수꾼을 둔 음전한 우체통이었다.
출향한 뒤, 가끔은 먼 하늘 저편에서 소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돌담 우체통도 그려졌다. 그게 사랑이라면 내 첫사랑은 싱거운 로맨스였다.
문학적 재능, 집념과 열정이 넘쳤던 그녀는 지금은 훌륭한 작가로 어딘가에서 주옥 같은 시들을 쓰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촌뜨기 이름은 예쁜 필명으로 바뀌었을 거고.
세월은 흘러가도 옛 생각은 남는다. 혹여 어느 시인의 눈에 이 글이 뜨일지 몰라 고비늙은 사람의 마음이 초조해진다. 휘휘한 달밤이면 혹여 나처럼 돌담 우체통을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한뉘 그러길 바란대도 새삼 이제 죄 되지는 않을 터, 남모르게 얼굴 붉히기에는 헛헛한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