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이들에게-장은영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자유전공학부 교수
2021년 06월 09일(수) 05:00
누구에게나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일은 어렵다. 봄이면 새로 피는 꽃처럼 인간관계도 해마다 리셋(reset)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한번 시작된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켜켜이 쌓일 뿐이다. 그런 걸 알기에 사람들은 되도록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고 애쓰며 생각이 좀 다르더라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미소로 응대하는 편을 택한다. 크고 작은 집단에 속하게 된 경우에도 원만한 관계를 위해 적당한 합의점을 찾는다. 동의할 수 없는 규칙과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참지 못하고 언쟁이라도 벌이고 돌아온 날에는 밤새 얼마나 후회스러웠던가. 그런 날을 생각하면 이견이 있어도 적당히 물러나는 위선이 세련된 관계의 필요충분조건처럼 생각될 지경이다.

그러나 냉정히 돌아보면 합의의 미소가 지탱하는 관계의 실상은 작은 불일치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얄팍한 것이거나 계약적, 위계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다른 생각을 드러내기 어려운 것일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인가 아니면 논쟁과 싸움을 피하기 위한 것인가. 어떤 경우든 관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섞여 있을 것이다. 불일치의 표명은 관계를 균열시키거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자신이 그 관계로부터 추방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동반한다. 그런 두려움은 불일치를 표명하는 일이 타인이나 공동체 등 자신의 외부를 향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내재된 감각의 문제임을 말해주는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것이 감각의 자율성이다.

쟈끄 랑시에르는 합의(consensus)와 불일치(dissensus)를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에서 논의했던 철학자이다. 그가 보기에 합의란, 불일치를 없애고 공동체를 하나로 만드는 정치적 행위이다. 합의의 정치는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고유한 자리와 역할 그리고 사고와 감각을 분배함으로써 체제를 지배한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이미 분배된 것을 거부하고 재분배를 요구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진짜 정치라고 주장한다. 평등하고 자율적인 의사가 표명되는 진짜 정치를 위해 랑시에르가 강조했던 것은 지배 체제가 강제하는 감각 체계를 거부하고 자신의 감각을 개발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자발성이다. 기존의 질서와 합의에 길들여지지 않은 감각이야말로 권력으로부터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적이든 공적이든 모든 관계는 합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그런데 합의와 신뢰는 상수항이 아니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라면 합의는 불일치를 통해 해체되거나 재조정됨으로써 서로를 더 자유롭게 만든다. 그리고 지배와 종속이 아닌 평등한 관계에서 싹트는 신뢰는 위선적 동의보다는 진실한 반대를 받아들임으로써 밀도를 높인다.

대학이라는 장소에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신입생들에게 감각의 자율성을 경험하며 밀도 높은 신뢰의 관계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대학이, 불편함을 피하기 위한 합의의 제스처가 통용되기보다는 자신의 감각과 목소리를 드러내며 자율성을 실현하는 관계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의견의 분분함과 엇갈림은 우리 자신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만약 그 불편함이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의 대가라면 기꺼이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벚꽃이 톡톡 터지는 학교를 걷다가 잠시 머리 위를 올려다본 적이 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는 벚꽃의 분분(紛紛)함이 어지럽고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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