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세지서 멜론 키우는 이재섭씨 “야근 없어 저녁은 온전히 가족과 귀농 지지해준 아내 가장 고마워”
2021년 01월 27일(수) 08:00
남도에서 새인생 新 전남인 <2>
부모님 농장 키워 6년만에 연 소득 7천만원…농업기술센터 큰 도움
국민 안전 먹거리 공급처 ‘농촌’, 코로나19 이후 중요성 더 커질 것
최소 2년 여유자금 마련 후 귀농…집·농지 등 구매 서두를 필요 없어

귀농 6년차 이재섭(46)씨가 지난 20일 나주시 세지면 내정리 농장에서 멜론을 들어보이고 있다. /나주=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도시를 떠나온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직장 스트레스. 광주에서 휴대전화 통신사 대리점 점장으로 근무하며 적잖은 급여를 받았지만, 실적 압박과 영업 스트레스는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나의 파도가 지나가면 더 큰 파도 수십 개가 밀려왔다. 그리고 그 파도는 끝이 없었다. “부모님 계시는 시골로 가서 농사짓고 싶어.” 잔뜩 술에 취해 귀가한 밤, 입버릇처럼 말하는 남편의 ‘귀농 타령’에 아내가 오케이했다. 그 후 6년. 초보 농군 티를 벗어 던진 그는 연간 7000만원을 벌어들이는 성공한 귀농인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농장은 시(市)에서 운영하는 예비 귀농학교의 견학코스로 자리 잡았고, 농장에서 생산된 겨울 멜론은 수도권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겨울 멜론 주산지로 널리 알려진 나주시 세지면으로 귀농한 이재섭(46)씨 이야기다.

“귀농 계기요? 회사 스트레스였죠. 60㎏ 중반이던 몸무게가 54㎏까지 빠졌어요. 정말 단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꾹꾹 참고 살았는지. 이렇게 살다간 제명에 못 죽겠다 싶어 잊을 만하면 말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오케이 한 거죠(웃음). 연로한 부모님이 시골에 계시는 것도 이유였고요”

귀농을 결심한 재섭씨는 귀농 지역으로 나주를 택했다.

귀농인 이재섭씨가 나주 세지면 농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이창동 집에서 아내 김양미(39)씨, 딸 빛나(12)양, 아들 희재(11), 민재(9)군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재섭씨 제공>
광주에서 초중고, 대학까지 마친 그는 나주가 고향은 아니지만, 그의 부모가 최근 20여 년 간 멜론 농장을 꾸려온 곳이어서 애착이 갔다. 집은 세지면 내정리 농장에서 차로 10분가량 떨어진 나주 이창동에 얻었다. 간호사 자격증이 있는 아내 김양미(39)씨는 영암지역 요양병원으로, 재섭씨는 멜론 농장으로 출근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덧 훌쩍 자란 세 자녀는 씩씩하게 학교·학원에 나가고 학교가 열지 않거나 방학하는 날엔 할아버지, 할머니와 시간을 보낸다.

지난 20일 찾아간 그의 농장에서는 한 눈에 봐도 탐스러운 멜론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바깥 기온은 영하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비닐하우스 온실 안은 30도를 웃도는 한여름 날씨였다. 설(2월 12일) 대목에 맞춰 상품성 있는 멜론을 출하하려고 온실 안팎을 분주히 오가는 재섭씨의 옷이 차갑게 식었다가 땀으로 흠뻑 젖기를 반복했다.

“멜론은 한 주(株)에 열매(멜론) 한 개만 남겨두고 모조리 솎아내야 해요. 영양이 열매 한 개에 온전히 집중되도록 해 상품성 있는 과일을 생산해야 하거든요. 설 대목에 맞춰 출하하려면 과일 몸집을 키워주는 동시에 당도도 끌어올려야 해요. 이맘때가 농가 소득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시기에요”

지난 6년간 재섭씨가 쏟은 땀과 눈물방울은 그가 농촌에 온전히 뿌리를 내리는 데 밑거름이 됐다. 부모와 이웃 농장주 등 선배 농부들의 조언을 경청하려는 마음가짐을 유지하려 애쓴 것도 실력을 키우는데 보탬이 됐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교육받고 공부해서 얻은 지식을 농사에 적용해온 실험 정신이 그가 온전히 홀로 설 수 있게 만들었다.

“귀농 첫해엔 부모님을 도와 부모님이 그동안 쭉 해오시던 것처럼 농사를 지었죠. 온실 두둑마다 빼곡하게 마치 정글처럼 멜론을 심었어요. 그런데 이듬해 나주시농업기술센터 교육을 받고 나서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작물을 빼곡하게 심으면 생산량은 많아지지만, 고생만 죽도록 하고 상품성도 떨어져 돈이 되지 않는다걸 알게 됐거든요. 실제 배운 대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해 재배해보니 품도 덜 들고 더 돈이 되더라고요”

나주농업기술센터 귀농 교육 과정에서 배운 토양교육도 적잖은 보탬이 됐다.

주변 농부들은 비료만 주고 연거푸 멜론을 심지만 재섭씨는 휴지기 등을 이용해 미생물을 땅에 준다. 농업기술센터에서 저가에 공급받는 미생물을 물과 섞어 농장에 뿌려주는 간단한 방식이다. 미생물을 주지 않고 비료만 뿌리고 연거푸 농사를 지으면 땅심이 약해질 수밖에 없고, 땅심이 약하면 작물이 잘 크지도 않고 좋은 열매를 거두지도 못한다는 게 미생물 농법 예찬론자 재섭씨의 지론이다.

재섭씨의 귀농 결심을 들은 부모는 6개 동(棟) 규모의 기존 농장에 더해 2개 동을 늘렸다.

농사가 손에 익은 아들은 차곡차곡 돈을 모아 3개 동을 인수했고 부모는 일선에서 물러났다.400평(1350㎡)짜리 한 동에 심어진 멜론은 약 2700주(株). 전체 11개 동 심어진 멜론은 3만 주 안팎. 연 매출 1억원을 훌쩍 넘는다. 난방비, 모종·비료비, 인건비 등을 제하면 소득은 7000만원 안팎.

겨울철 시설 재배를 통해 시장에 풀리는, 나주의 명물 ‘세지 멜론’ 농사만으로 거두는 소득이다. 8월 말에 모종 심고 키워 11월에 출하하고, 12월에 다시 모종 심고 2~3월에 출하하는 이기작(二期作)이다. 모종 심기, 출하 작업 등 일손이 바쁜 날엔 부모와 누나 등 농장 인근에 거주하는 가족과 인부들이 일손을 돕는다. 생산된 멜론은 재섭씨가 속한 세지멜론연합회와 계약된 농협을 통해 전량 출하돼 판로 걱정은 없다. 봄부터 가을에는 가족들이 먹을 벼농사도 짓는다.

멜론 농사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은 재섭씨이지만 그도 귀농 초기 시행착오를 겪었다.

귀농 이듬해인 2017년 “이제 네 마음대로 키워봐라”고 부모가 맡긴 하우스 한 동에 약을 잘못 쳤다가 농사를 망친 것이다. 과육을 키우는 시기에 흰가루병이 와 약을 쳤는데 농도 조절에 실패해 멜론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성장을 멈춰버렸다. 제대로 키웠다면 1000만원 정도 매출을 올렸겠지만, 손에 쥔 것은 10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재섭씨는 자신의 시행착오에서 예비 귀농인들이 도움을 얻길 바랐다.

기대와 달리 귀농 첫해 또는 2년 연속 농사를 망칠 경우까지 대비해 최소 2년 이상 소득이 없어도 버틸 수 있는 여유 자금을 마련한 뒤 농촌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조언이다. 도시에서는 매월 급여를 받지만, 농촌은 사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농촌진흥청이 지난 2019년 7월 내놓은 귀농·귀촌인 정착실태 장기추적조사 결과는 참고할 만 하다. 2014년 귀농·귀촌인 1039명을 5년 동안 지속 조사한 결과, 이 기간 89명(8.6%)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는 역귀농을 택한 것으로 조사됐는데, 역귀농의 가장 큰 이유로 영농실패(18명)가 지목됐다.

재섭씨는 작목 선택에 대해선 “귀농 지역, 귀농 마을의 특산물을 선택하면 실패 확률이 낮다”고 말했다. 농법을 배우거나 판로를 확보하기에도 좋고, 많은 농가가 재배하고 있다는 자체가 작목과 마을의 궁합이 검증됐다는 것이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주택과 농지 매입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조언했다. 주택과 농지는 구매는 쉽지만 되팔기는 어렵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은 임대하거나 자치단체 지원을 받아 헌 집을 고쳐 사용하고, 농지는 임대 방식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조언했다.

안정적인 소득 말고 농부로서의 삶이 재섭씨에게 주는 장점은 뭘까.

저녁을 온전히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농촌에서는 웬만하면 야근이 없다. 날이 저물면 일과도 끝이다. 도시와는 다른 삶이다.

도시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19는 농촌을 비껴가지 않았다. 도시 못지않은 타격을 줬다. 인구 밀도가 낮은 농촌은 도시보다 확진자 발생 비율이 현저히 낮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취약한 의료 환경을 이번 기회에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농업 부문만을 놓고 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때 들어오지 못하면서 일손 구하기가 큰 걱정거리로 떠올랐다. 모임·행사 감소와 유흥업소 영업 제한으로 멜론·수박 등 과일 수요가 줄어들면서 농가의 벌이도 이전만 못 하다. 그렇지만 재섭씨는 “농촌은 도시보다 낫다. 도시 자영업자들은 생계를 넘어 생존을 위협받고 있지만, 농촌은 소득이 줄어들 망정 타격까지는 아니다”고 웃어넘겼다. 그러고선 “인간은 먹지 않고 살 수 없는 것 아니냐. 헬스장, 노래방은 안 가도 살 수 있지만 먹지 않고선 아무도 살 수 없다”며 “먹거리 생산기지로서 번잡한 도시와 달리 한가롭고 공기 좋은 농촌의 가치는 점점 더 올라갈 것”이라고 자신했다.

/나주=김형호 기자 kh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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