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적 서정과 자연 아우른 ‘단편미학’ 선구자
2020년 09월 21일(월) 00:00 가가
<8> 울산 오영수 문학관
그 문학관은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했다. 자연친화적인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그 자리에 문학관이 있어야 할 것처럼, 주위는 단아하면서도 아름답다. 오솔길을 조금 확장한 길을 걸어 들어서면, 저만치 아담한 건물이 보인다. 모던하면서도 세련하지만 그렇다고 자연을 거스르지는 않는다.
오영수 문학관. 마치 ‘문학관은 이런 곳에 있어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는 듯하다. 번잡하지 않다. 주위의 풍경이 마음을 위무하듯 토닥여준다. 문학인이 아니어도 이곳에 들르는 이들은 불현듯 글 한 줄 쓰고 싶을 것 같다.
오영수(1909~1979)의 호는 월주(月州), 난계(蘭溪)다. 이름이나 호칭은 그 사람을 드러내는 가장 명징한 언어다. 월주(月州)와 난계(蘭溪)가 표상하는 것은 자연이다. 특히 ‘난이 피어 있는 계곡’이라는 의미는 그의 성정 내지는 천품을 집약한다. 청정한 계곡에 벗하고 있는 난의 모습이 그려진다.
오영수는 ‘난’ 같은 작가다. 문학적 명성으로 명리를 좇거나 사사로운 이익에 자신의 문학적 혼을 팔지 않았다고 한다. 작가도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존재라, 더러는 크고 작은 유혹이 있을 수 있다. 문학사에서 시류에 편승하거나 대의를 저버리고 권력에 빌붙어 독자들을 배반했던 이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오영수의 자리가 빛을 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광주에서 울산 언양까지는 꽤나 먼 거리다. 비록 예전에 비해 교통여건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넉넉잡고 300여km에 이르는 길은 쉬이 나설 여정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의 본질은 떠남과 여정에 있듯, 문학사에서 별이 되었던 문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늘 설렘과 기대를 갖게 한다.
9월 태풍이 먼 해상에서 올라온다는 뉴스가 발길을 붙잡았다. 그러나 철저한 방역수칙에 따라 빠른 시간에 관람을 한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온 길이었다. 마음은 급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느긋해야 하는 법.
그렇게 달려 울산에 당도했다. 오영수문학관은 울산에서도 조금 떨어진 울주군 언양읍에 자리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이었지만, 낯설음을 상쇠하고도 남을 여정이었다. 언급한 대로 문학관을 배경으로 한 공간이 한폭의 그림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오랫동안 뇌리에 인화해두고 싶은 모습이었다.
오영수는 1911년 경남 울주군 언양면(현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에서 태어났다. 고향 언양은 주위에 높은 산들이 많은 곳이다. 운문산, 천황산, 취서산, 간월산 등에 둘러싸여 있는데다 남천강을 끼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의 풍경이다. 그렇게 작가의 내면에 향토적 이미지와 감성이 착근했으리라.
맏아들로 태어난 오영수는 열 살 무렵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다. 문학관 자료실에는 그의 삶의 내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17세에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청년기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을 하며 이듬해 나니와 중학교 속성과를 수료했다. 이후 일본대학 전문부에 들어가지만 각기병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귀국한다.
병약한 체질이었었지만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뛰어났다. 글씨도 잘 썼고, 그림에도 소질이 있을 만큼 예술 방면에 다재다능했다. 아마도 이러한 재능은 한학자였던 부친의 문기(文氣)를 물려받은 것 같다. 어린 시절 서당 훈장과 부친 밑에서 한문을 배운 덕분에 한문학 또한 뛰어났다.
그의 문단 등단은 1949년 김동리 추천으로 ‘신천지’에 ‘남이와 엿장수’를 발표하면서다. 1955년에는 조연현 평론가 등과 함께 ‘현대문학’을 창간했으며, 이후 11년간 편집장을 맡았다. 1955년 제1회 한국문학가협회상, 197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평자들은 오영수 하면 ‘단편문학의 미학’을 꼽는다. 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도 그의 단편소설이 지닌 단아함과 정감의 감성을 떠올린다. 대표작 ‘갯마을’은 원점 회귀라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던 ‘갯마을’은 삶의 존재론적인 공간을 상징한다.
해순은 남편 성구가 고기잡이를 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어렴풋이 불행을 예감한다. 행복했던 꿈은 무너지고 청상과부로 전락한다. 얼마 후 떠돌이 상수를 만나 육지로 떠난다. 그러나 상수가 징용으로 떠나자, 해순은 바다가 그리워진다. 결국 상수마저 돌아오지 않게 되자 해순은 갯마을로 돌아온다.
“모든 소설은 향수라는 말이 있다. 고향과 집은 욕망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공간의 시학으로 바다(갯마을)와 산(산골)은 오영수 문학에서 가장 친화적인 공간이다. 오영수 문학의 대표작으로 이해되는 ‘갯마을’은 바로 이런 귀향 또는 원점으로 돌아옴의 율동 양식과 깊이 관련지어진 작품이다. 두 사람의 남편으로 인해 행·불행의 융체(隆替)를 거듭해 오던 해녀 주인공 해순은 결국 그가 떠났던 갯마을로 끝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 그것이다.”(이재선, ‘현대소설의 서사시학’, 學硏社, 2002, 359쪽)
평론가 이재선 박사의 언급처럼 ‘갯마을’은 “비록 비극적인 운명과 불행의 굴절이 더 많은 곳이라고는 할지라도 해순에게는 그가 태어나서 일하고 사랑을 한 곳이며 또 다시 살아야만 할, 즉 재생을 충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지난 2014년 개관한 오영수문학관은 지상 2층, 연면적 538㎡ 규모다. 울산에 지역 출신 문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처음이다. 전시실에는 가족 등이 기증한 유품이 전시돼 있다. ‘갯마을’, ‘머루’ 등 문고판과 습작원고, 필기도구에는 그의 체취가 묻어 있다.
이연옥 문학관 관장은 “작가는 원고료 수입이 보장되는 장편 연재를 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일관되게 추구했다”며 “그의 문학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고전적인 인간의 모습과 서정적인 감성을 선사한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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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정원에 있는 작가의 동상. |
9월 태풍이 먼 해상에서 올라온다는 뉴스가 발길을 붙잡았다. 그러나 철저한 방역수칙에 따라 빠른 시간에 관람을 한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온 길이었다. 마음은 급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느긋해야 하는 법.
그렇게 달려 울산에 당도했다. 오영수문학관은 울산에서도 조금 떨어진 울주군 언양읍에 자리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이었지만, 낯설음을 상쇠하고도 남을 여정이었다. 언급한 대로 문학관을 배경으로 한 공간이 한폭의 그림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오랫동안 뇌리에 인화해두고 싶은 모습이었다.
오영수는 1911년 경남 울주군 언양면(현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에서 태어났다. 고향 언양은 주위에 높은 산들이 많은 곳이다. 운문산, 천황산, 취서산, 간월산 등에 둘러싸여 있는데다 남천강을 끼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의 풍경이다. 그렇게 작가의 내면에 향토적 이미지와 감성이 착근했으리라.
맏아들로 태어난 오영수는 열 살 무렵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다. 문학관 자료실에는 그의 삶의 내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17세에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청년기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을 하며 이듬해 나니와 중학교 속성과를 수료했다. 이후 일본대학 전문부에 들어가지만 각기병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귀국한다.
병약한 체질이었었지만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뛰어났다. 글씨도 잘 썼고, 그림에도 소질이 있을 만큼 예술 방면에 다재다능했다. 아마도 이러한 재능은 한학자였던 부친의 문기(文氣)를 물려받은 것 같다. 어린 시절 서당 훈장과 부친 밑에서 한문을 배운 덕분에 한문학 또한 뛰어났다.
그의 문단 등단은 1949년 김동리 추천으로 ‘신천지’에 ‘남이와 엿장수’를 발표하면서다. 1955년에는 조연현 평론가 등과 함께 ‘현대문학’을 창간했으며, 이후 11년간 편집장을 맡았다. 1955년 제1회 한국문학가협회상, 197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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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현 평론가 등과 함께 창간했던 ‘현대문학’. |
해순은 남편 성구가 고기잡이를 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어렴풋이 불행을 예감한다. 행복했던 꿈은 무너지고 청상과부로 전락한다. 얼마 후 떠돌이 상수를 만나 육지로 떠난다. 그러나 상수가 징용으로 떠나자, 해순은 바다가 그리워진다. 결국 상수마저 돌아오지 않게 되자 해순은 갯마을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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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평생 단편소설만을 썼던 단편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디오라마로 형상화한 대표작 ‘갯마을’ |
평론가 이재선 박사의 언급처럼 ‘갯마을’은 “비록 비극적인 운명과 불행의 굴절이 더 많은 곳이라고는 할지라도 해순에게는 그가 태어나서 일하고 사랑을 한 곳이며 또 다시 살아야만 할, 즉 재생을 충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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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사용했던 파이프를 비롯한 유품들. |
이연옥 문학관 관장은 “작가는 원고료 수입이 보장되는 장편 연재를 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일관되게 추구했다”며 “그의 문학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고전적인 인간의 모습과 서정적인 감성을 선사한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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