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 대쪽같던 문인이 시대에게 던진다 "사람답게 살아가라"
2020년 08월 31일(월) 00:00
<7> 부산 요산 문학관
요산(樂山) 김정한(1908~1996)은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았던 작가다.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이었으며 불의한 현실에 맞섰던 지사였다.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의 길이 아니다.” 그의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시대를 초월해 오늘을 사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금언이다. 그의 말에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외양만 사람일 뿐 그렇지 못한 이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요산(樂山) 김정한 작가. 그의 삶은 세 층위의 항거와 밀접한 연관을 이룬다. 일제강점기에는 반일운동을, 해방 후로는 독재에 항거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절망의 농촌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을 썼다. 반일운동, 독재 항거, 현실고발은 그의 삶이 불의한 세대와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했음을 보여준다.

앞서의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말은 소설 ‘산거족’의 주인공 황거칠의 좌우명이다. 소설 속 인물의 좌우명이 작가의 좌우명이 된 셈이다. 한편으로 일제시대와 군부독재시대를 살며 깨어 있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문인으로 선 굵은 활동을 해왔던 작가의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광주에서 부산까지는 그리 짧은 거리는 아니다. 요산의 문학을 알현한다는 기대와 설렘은 오늘의 코로나의 불안도 저만치 밀쳐냈다. 물론 한여름의 탁 트인 바다를 기대하기보다는 방역수칙과 안전이라는 생각을 염두하며 떠난 길이었다.

문학관 정원에 있는 돌탑,
차창으로 들이치는 햇살은 바늘끝처럼 따갑고 뜨거웠다. 간혹 열어젖힌 창밖으로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부산에는 항구도시 특유의 분위기가 있지만, 내륙은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남도가 고전적인 그런 묵향의 분위기라면 부산과 영남은 다소 수채화가 가미된 담채화의 느낌이었다.

요산문학관은 부산시 금정구 남산동에 있다. 소설 ‘사하촌’과 ‘모래톱 이야기’의 작가 김정한의 삶과 작품 세계가 집약된 공간이다. 지난 2006년 11월에 개관한 이곳은 200여 평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건립됐다.

김정한 작가의 유품.
1층에는 다양한 책들을 비치한 북카페가 꾸며져 있다. 2층은 김정한 작가의 유품을 비롯해 생전 인터뷰 장면을 담은 영상시설과 3000여 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특히 3층에는 창작 공간을 모티브로 한 집필실이 마련돼 있으며 지하는 강당과 다목적 홀로 구성돼 있다.

전체적인 규모는 아담하다. 그다지 넓지 않지만 생가를 겸한 정원이 펼쳐져 있어 여백의 분위기를 피워낸다. 방문객들은 정원을 거닐며 요산이 꿈꿨던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잠시나마 가늠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문학관 초입에 아담한 한옥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상했던 대로 생가였다. 문학관 부지로 생가가 편입돼 작가의 문학세계를 좀더 확장된 시각으로 엿볼 수 있다. ‘樂山燕居’. 요산이 편안히 기거하는 집이라는 뜻인 듯하다. 누구에게나 생가는 가장 안온하며 맞춤한 공간일 게다. 건물의 규모나 배경이 아닌 정서적인 배경으로서의 분위기 말이다.

문학관과 생가가 높은 언덕에 자리한 탓에 시야가 트인다. 요산 문학이 이곳을 근거로 움트고 꽃피웠을 게다. 생가 앞에는 작은 대나무가 무리지어 있다. 작지만 옹골찬 시누대는 마치 요산의 정신이 현현된 것처럼 보인다. 요산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는 작가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푸른 대나무와 같은 문인이었다. 대쪽처럼 꼿꼿하고 푸르기가 쪽빛에 비할 데 없어 존재 자체만으로도 빛나던 소설가였다. 앞마당에 다른 무엇보다 어울리는 게 바로 대나무이자, 시누대다. 바람에 잠시 흔들릴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는, 뿌리를 견고히 붙박은 요산의 정신을 본다.

요산은 1908년 경남 동래군 북면 남산리(부산시 금정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6세부터 향리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19년 범어사에서 운영하는 사립명정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중앙고보, 동래고보를 거쳐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도쿄 조도전대학 부속 제일고등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며 1931년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펴낸 ‘학지광’ 편집을 맡는다. 1932년 여름방학 때 귀향했지만, 때마침 발발한 양산농민봉기사건에 관련돼 학업을 중단한다. 1933년 남해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농민문학에 뜻을 두기로 정한다.

부산에 있는 요산 문학관은 ‘사하촌’의 작가 김정한의 삶과 문학적 혼이 응결돼 있는 의미있는 공간이다.
김정한 하면 떠올리는 작품은 ‘사하촌’이다.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소설은 작고 힘없는 사람을 향한 연민을 견지한 작품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됐던 농민과 소시민들을 향한 애정을 그렸다.

권영민은 ‘한국문학사’(민음사·1993)에서 “억눌리고 가진 것 없는 자들의 고통스런 삶을 그려내고 있는 그의 문학이 1960년대 후반 이후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리얼리즘의 실천적인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도 수긍할 수 있으며, 현실지향적 의식과 역사의식을 1970년대의 소설적 성과를 기약할 수 있게 만든 하나의 추진력이 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가는 한때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후 부산중학교 교사, 부산대 교수,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5·16 때는 교수직을 박탈당했다가 이후 복직되기도 한다. 1974년 진보적 문학가들의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고문을 맡았고 1987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 의장을 역임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고전적인 명제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가 바로 김정한이다. 아울러 김정한은 “작가는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명제와도 부합한다. 한마디로 그의 삶은 ‘행동하는 작가’로 요약된다.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그는 작품을 넘어 직접 몸으로 그 명제를 실천하고자 몸부림쳤던 우리시대의 작가였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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