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의 ‘맛있는 이야기’] 음식의 지역 명칭을 허하라
2020년 06월 04일(목) 00:00 가가
‘우동 한 그릇’이라는 일본 소설이 있다. 섣달그믐날 밤 북해도의 한 우동집에 가난한 세 모자가 들어와 우동 한 그릇을 주문한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송구한 표정으로 우동 한 그릇을 주문한 모자. 그들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우동집 주인장은 티 나지 않게 반 그릇 분량의 우동을 더 담아 내준다. 이렇게 시작된 소설은 각박한 세상에서 상대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배려를 잊지 않고 은혜를 갚는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일본의 한 중의원이 1989년 중의원 예산위원회 회의장에서 소설 전문을 낭독해 회의장을 울음바다로 만든 후 ‘우동 한 그릇’은 일종의 사회현상이 되었다. 일본에서 이렇게 화제가 되니 당연히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었고 심지어 밀리언셀러가 될 정도였다.
문제는 번역된 소설의 제목. 이 소설의 원제목은 ‘한 그릇의 가케소바(一杯のかけそば)’. 번역 당시 ‘가케소바’가 익숙하지 않은 음식이라 우동으로 의역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30년 가까이 ‘한 그릇의 가케소바’는 ‘우동 한 그릇’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런데 이건 엄청난 오류다. 일본에는 섣달그믐날 밤 메밀국수를 먹는 풍습이 있다. 이를 해를 넘기며 먹는 메밀국수라는 의미로 ‘도시코시소바’라 한다. 한 해 동안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새해의 행운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먹는 것이다. 에도시대 금세공 기술자들이 메밀 반죽을 이용해 세공 과정에서 떨어진 금가루를 모은 것에서 유래된 전통이다.
세 모자가 굳이 섣달그믐날 밤에, 굳이 메밀국수집을 찾은 건 당장의 배고픔보다는 내일의 희망을 갈구하는 간절함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거세하고 가케소바를 우동으로 바꾸면, 가난하고 굶주린 엄마와 두 아들밖에 남지 않는다. 단지 음식 명칭 하나 바꿨을 뿐인데 소설의 주제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음식 명칭 자체가 가진 서사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음식의 명칭은 식재료와 조리법의 조합으로 구성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런 일반론을 벗어나 하나의 스토리가 음식의 명칭으로 굳어진 경우도 많다. 심지어 ‘도시코시소바’의 경우처럼 지역의 풍습과 결합될 경우 명칭이 내포하는 의미는 훨씬 확장된다. 따라서 남의 음식이든 내 음식이든, 음식의 명칭은 원어 그대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한국 음식의 경우 외국어 표기에 특히 혼란이 많았다. 자음 받침이 유난히 많고 심지어 ‘쌍자음’까지 받침으로 쓰는 경우가 적지 않은 한글의 특성 때문이었다. 여기에 우리 문화에 대한 자의식 부족까지 한몫 거들었다. 그 결과 이상한 음식 이름들이 등장했으니,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육회를 ‘six times’, 곰탕을 ‘bear thang’, 칼국수를 ‘Knife-cut Noodle’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다행히 한식재단이 나서 200가지 한국 음식에 대한 영어·중국어·일본어 표준 번역안을 확정함으로써 이러한 혼란은 일단락되었다.
대외적인 표기는 이렇게 정리되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중앙집권적 국가 체계가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유난히 표준어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여기에 각 지방의 토산물을 세금으로 걷는 공납 덕분에 식재료의 명칭이 일찍부터 통일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획일성이 오히려 한국 음식의 확장성을 막는 경우가 많다.
강과 하천의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지었던 한반도에서 다슬기는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채취할 수 있는 식재료였다. 자연스럽게 지역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달랐다. 충청도에서는 올갱이, 전라도에서는 대사리, 경상도에서는 고디, 강원도에서는 꼴팽이 등으로 불렀다. 같은 국을 끓여도 지역의 환경과 여건에 따라 조리법도 달랐다. 어디는 민물새우로 국물을 내 맑게 끓이고, 어디는 된장을 푸는가 하면, 어디는 고추장을 풀어서 끓였다. 이처럼 지역의 고유한 정서와 환경에서 비롯된 명칭과 조리법은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언어를 통일한다고 그 음식에 담긴 정서까지 통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스탠퍼드대학의 언어학 교수인 댄 주래브스키는 그의 저서 ‘음식언어’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음식의 언어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도,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인간의 지각과 감정의 본성에서부터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관련한 사회심리학까지도 말해 준다.” 즉 음식의 명칭은 그 자체로 정체성이자 서사이며, 음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심리를 반영한다. 따라서 다소간에 혼란이 있더라도 식재료와 음식에 대한 지역 명칭만큼은 지킬 필요가 있다. 나는 오히려 그런 혼란이 한국 음식의 다양성의 상징이며 지역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편이라 믿는다.
<맛 칼럼니스트>
세 모자가 굳이 섣달그믐날 밤에, 굳이 메밀국수집을 찾은 건 당장의 배고픔보다는 내일의 희망을 갈구하는 간절함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거세하고 가케소바를 우동으로 바꾸면, 가난하고 굶주린 엄마와 두 아들밖에 남지 않는다. 단지 음식 명칭 하나 바꿨을 뿐인데 소설의 주제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음식 명칭 자체가 가진 서사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음식의 명칭은 식재료와 조리법의 조합으로 구성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런 일반론을 벗어나 하나의 스토리가 음식의 명칭으로 굳어진 경우도 많다. 심지어 ‘도시코시소바’의 경우처럼 지역의 풍습과 결합될 경우 명칭이 내포하는 의미는 훨씬 확장된다. 따라서 남의 음식이든 내 음식이든, 음식의 명칭은 원어 그대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한국 음식의 경우 외국어 표기에 특히 혼란이 많았다. 자음 받침이 유난히 많고 심지어 ‘쌍자음’까지 받침으로 쓰는 경우가 적지 않은 한글의 특성 때문이었다. 여기에 우리 문화에 대한 자의식 부족까지 한몫 거들었다. 그 결과 이상한 음식 이름들이 등장했으니,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육회를 ‘six times’, 곰탕을 ‘bear thang’, 칼국수를 ‘Knife-cut Noodle’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다행히 한식재단이 나서 200가지 한국 음식에 대한 영어·중국어·일본어 표준 번역안을 확정함으로써 이러한 혼란은 일단락되었다.
대외적인 표기는 이렇게 정리되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중앙집권적 국가 체계가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유난히 표준어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여기에 각 지방의 토산물을 세금으로 걷는 공납 덕분에 식재료의 명칭이 일찍부터 통일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획일성이 오히려 한국 음식의 확장성을 막는 경우가 많다.
강과 하천의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지었던 한반도에서 다슬기는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채취할 수 있는 식재료였다. 자연스럽게 지역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달랐다. 충청도에서는 올갱이, 전라도에서는 대사리, 경상도에서는 고디, 강원도에서는 꼴팽이 등으로 불렀다. 같은 국을 끓여도 지역의 환경과 여건에 따라 조리법도 달랐다. 어디는 민물새우로 국물을 내 맑게 끓이고, 어디는 된장을 푸는가 하면, 어디는 고추장을 풀어서 끓였다. 이처럼 지역의 고유한 정서와 환경에서 비롯된 명칭과 조리법은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언어를 통일한다고 그 음식에 담긴 정서까지 통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스탠퍼드대학의 언어학 교수인 댄 주래브스키는 그의 저서 ‘음식언어’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음식의 언어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도,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인간의 지각과 감정의 본성에서부터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관련한 사회심리학까지도 말해 준다.” 즉 음식의 명칭은 그 자체로 정체성이자 서사이며, 음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심리를 반영한다. 따라서 다소간에 혼란이 있더라도 식재료와 음식에 대한 지역 명칭만큼은 지킬 필요가 있다. 나는 오히려 그런 혼란이 한국 음식의 다양성의 상징이며 지역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편이라 믿는다.
<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