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된 정의’
2020년 05월 25일(월) 00:00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디케(DIKE)는 정의의 여신이다. 정의를 뜻하는 디케는 로마시대에는 유스티티아(Justitia)로 바뀌었다. 영어 저스티스(justice)가 여기서 유래됐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신화 속 디케는 칼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로마시대 유스티티아에는 공평함을 뜻하는 저울이 추가됐다. 오늘날 정의의 여신상이 칼과 천칭(天秤: 저울)을 든 모습을 한 것은 그러한 유래와 무관치 않다. 판결의 엄격함과 공정성을 견지하라는 의미다.

요즘처럼 ‘정의’라는 말이 희화화된 적이 없다. 역설적으로 정의롭지 않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들 수 있겠다. 정의연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돕는다는 취지로 많은 이들에게서 적잖은 기부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사용처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드러났다. 게다가 정의연을 이끌어 온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당선인의 비리 의혹으로 번지고 있어, ‘정의’의 본래 의미가 퇴색돼 버렸다.

짐작컨대, 정의연의 출발은 말 그대로 정의로웠을 것이다. ‘종군 위안부를 강제 연행한 증거가 없다’는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에 맞서 ‘생존해 있는 할머니들의 기억이 바로 생생한 증거’라는 확신 아래 지난한 시간을 견뎌 왔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연이 30년간 수요집회를 열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할머니들을 교묘히 이용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하버드대 교수인 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하는지로 정의로움은 결정된다”고 했다. 정의는 구호나 담론이 아닌 행위로서 그 가치가 담보된다는 의미다.

정의(正義)에서의 ‘의’(義)는 ‘양’(羊)과 나를 뜻하는 ‘아’(我)가 합쳐진 글자다. 양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바치던 제물을 상정하기에, 의로움은 하늘과 내가 일치되는 상태를 일컫는다. 정의를 기억하는 방식이 투명하지 않다면 ‘위장된 정의’일 뿐이다. 우리시대의 정의가 자꾸만 폄훼되고 다툼으로 비화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분명한 것은 정의는 더 이상 진보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박성천 문화부 부장 skypark@kwangju.co.kr

실시간 핫뉴스

많이 본 뉴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