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이야기] 조팝나무와 보릿고개
2020년 04월 21일(화) 00:00

[이 정 한국은행 광주전남본부장]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에 적극 동참한 지 벌써 3개월째다. 즐기던 체육시설도 폐쇄하고, 세미나, 포럼, 각종 모임도 연기했다.

하지만 장기간 강제 칩거에 따른 육체적 무료함이 자칫 심리적 우울감으로 감염될 수도 있고, 업무 생산성도 떨어질 거라는 자가 진단을 핑계 삼아 작은 일탈을 감행한다. 필자가 선택한 일탈은 바로 점심시간을 이용한 산책. 물론 이런 행동이 사회적 거리 두기의 취지에서 벗어나면 안될 터이니 빈틈없는 방어 기재로 보완한다.

마스크로 중무장하고, 눈빛은 행인들과의 일정 거리 유지를 위한 거리 측정용 레이더로 활용한다.

간혹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몰지각한 시민이 접근하면 잠재적인 바이러스 전파자로 인식, 자동으로 5m 이상의 원거리를 유지한다. 자주 측정하다 보니 ‘눈대중 레이더’의 성능이 이젠 거의 인공 지능급이다.

산책로는 주로 회사 인근의 5·18 기념공원. 격동의 70~80년대, 민주화를 위해 소중한 육신을 산화했던 선배들은 당시의 민주화운동을 밑거름으로 세계 일류 국가로 성장한 대한민국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할까? 추모의 생각도 잠시, 꽃으로 흐드러진 봄의 향연을 즐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계절은 수많은 봄꽃으로 공원을 수놓고 시민들을 유혹한다. 봄의 전령 산수유로부터 시작하여 개나리, 벚꽃, 목련, 동백 등등.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 노랫말처럼 벚꽃이 꽃가루 되어 봄바람에 흩날릴 즈음, 바통을 이어받아 피는 꽃이 있다. 바로 최근 들어 5·18 기념공원 산책로 입구에 순백의 쌀가루 마냥 풍성하게 만개한 조팝나무다. 조팝나무는 꽃 모습이 튀긴 조밥(좁쌀밥)처럼 보인다고 해서 조팝나무라고 한다. 끼니 걱정이 많았던 가난한 선조들의 희망 섞인 이름임에 틀림없다.

개화 시기도 절묘하다. 4월 20일은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인데,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곡우 즈음해서 지난해 수확한 식량이 떨어지고 보리는 여물지 않아 끼니 걱정이 많아진다. 소위 ‘보릿고개’가 시작되는 배고픈 시절에 야속하게도 쌀밥처럼 생긴 조팝나무 꽃이 만개하는 것이다.

뜬금없이 조팝나무가 필자의 재미없는 경제 칼럼에 왜 헤드라인으로 등장하였나? 조팝나무의 하얀 자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불현듯 지금의 ‘보릿고개 경제 상황’이 오버랩되어서이다.

코로나19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특히 미국, 유럽 등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요 국에서 전례 없는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 도시 봉쇄, 생산 중단은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동시에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상당수 전문가들은 코로나 사태가 해결되면 경제 상황이 급반등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즉 지금의 소비와 생산 절벽에 따른 ‘보릿고개’를 잘 넘어가기만 하면 조팝나무 꽃처럼 풍요로운 쌀밥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주요 선진국뿐만 아니라, 기축 통화 국가가 아닌 우리나라조차 부작용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규모의 유동성 확대 정책을 펼치는 것도 일시적인 매출 절벽에 직면한 기업들이 보릿고개를 넘어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자는 것이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갯길, 주린 배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힘을 내자! 우리 국민은 어느 인기 트로트 가수의 노랫말처럼 물 한 바가지로 보릿고개를 넘던 선조들의 위기 극복 DNA를 물려받지 않았는가?

5·18 공원에 활짝 핀 조팝나무여, 보릿고개가 시작되는 곡우(穀雨)에 꽃이 피는 너에겐 다 계획이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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