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야만과 증오의 바이러스 - 마리즈 콩테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2020년 02월 27일(목) 00:00
소설은 1692년 미국의 작은 마을 세일럼과 그 인근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당시 유럽을 휩쓸던 마녀재판의 열기가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닿았던 것이다. 흔히 비이성적인 군중심리를 통해 무고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마녀사냥이라고 한다. 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사냥은 엄연하게도 재판이라는 절차를 통해 이뤄졌다. 사냥과 재판이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법한 단어 둘은 이렇게 ‘마녀’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깨동무를 한다. 야만성과 합리성의 만남. 증오와 이성의 합일.

주인공 티투바는 당시 마녀재판의 피해자 중 유일한 유색인종이다. 그녀는 카리브의 섬 바베이도스 출신이다. 아프리카에서 납치된 그녀의 어머니가 바베이도스에 오는 배의 갑판에서 영국인 선원에게 강간당해 그녀는 태어났다. 티투바의 어머니 아베나와 양아버지 야오는 사탕수수 농장의 오두막에서 잠시뿐일 행복을 맛보지만, 야만적인 인종주의적 폭력 앞에 희생된다. 티투바는 홀로 남는다. 사람들의 연대감과, 그 어떤 신비한 힘에 이끌려 성장하지만, 그녀 안에 들끓는 분노와 그 분노를 부채질하는 위선과 증오의 역사는 변함이 없다.

야생에서 죽지 않고 자라 다시 사회에 편입한 티투바에게 주어진 운명은 노예로서의 삶이 전부다. 어떤 백인에게는 멸시를 받지만 또 어떤 누군가와는 우정을 나눈다. 어느 주인에게는 폭행을 당하고 또 어느 동료와는 사랑을 나눈다. 노예이지만 사람이기에 그들에게는 감정이 있고 욕망이 있으며, 자유에 대한 갈구 혹은 두려움과 마주한 비겁이 있다. 티투바에게 닥치는 불운은 그녀가 흑인이거나 여성임에 기인한다. 흑인이어서 노예가 되고 흑인이기에 가혹한 폭력에 마주하게 된다. 그러한 흑인도 이야기하는 바, 삶은 남자에게 관대하다.

1692년의 마녀재판은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세일럼의 여성을 압박했다. 세라 굿, 세라 오즈번, 티투바로부터 재판은 시작됐으나 그 결과는 여성 열아홉 명과 남성 한 명의 사형이었다. 재판 중이거나 복역 중에 사면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복권되어 그 기록이 남았으나 그중 유일한 흑인이었던 티투바에 대한 기록은 없다. 소설은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장막에 갇힌 티투바의 삶을 해방한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노예선에서부터 바베이도스에서 있었던 도망 노예들의 반란에 이르기까지, 티투바는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욕망하며 스스로 선택한다.

마녀재판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한 티투바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마녀로서 취급된다. 하지만 실제 야만적이었던 것은 성경에 손을 얹고 학살과 폭행을 자행한 백인들이었다. 그들은 유태인의 집을 태우고 아이들을 살해했고, 흑인 노예를 폭행하고 이에 저항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목을 매달아 죽였다. 이들의 행위가 합리적인가? 그들은 마녀사냥이라는 광기를 재판이라는 시스템으로 구현한다. 신앙이라는 신성성을 인종차별이라는 폭력성으로 재구축한다. 청교도적 시스템과 규율이 얼마나 정확한지, 감옥에서 풀려난 티투바가 다시 노예가 된 이유는 감옥에서의 ‘숙박비’와 ‘쇠사슬 값’과 같은 비용을 갚지 못해서이다.

이 참혹한 블랙코미디에 당시의 종교는 복무했다. 갖가지 이유로 마을의 여성을 마른 장작 위에 올린 이들의 직함은 목사였다. 그들은 재판관이었고, 종교인이었으며, 남성이었다. 신의 가르침을 완전히 배반하는 형태로 그들은 신의 심부름꾼이 되어 더더욱 잔인해졌다. 이러한 증오와 협잡에 티투바는 다소의 영적인 존재로서 맞서지만, 읽는 이에게 티투바에게 부여된 환상적 장치는, 저 거대한 폭력에 비해 매우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티투바는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보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8년 대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마리즈 콩테의 대표작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는 우리에게 종교적인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오로지 현생의 복을 위해 기도하고, 다음 생의 영생을 위해 무리하고 폭력적인 선교 활동을 일삼는 게 근대의 종교는 아닐 것이다.

무엇이 사이비인가 하는 논쟁은 종교계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종교라는 이름의 폭력과 야만이 사회의 앞면에 대두될 때, 우리는 이성을 잃기 쉽다. 어쩌면 바이러스보다 더 치명적인 결과를 맞을지도 모른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