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야기] 망각의 진통 효과
2020년 02월 25일(화) 00:00

[이정 한국은행 광주전남본부장]

해가 갈수록 깜빡깜빡하는 정도가 심해진다. 경자년 새해 인사를 나누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달포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기억 담당 중추인 해마가 쪼그라든 탓이리라.

게으른 해마를 단련시킬 겸, 먼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 보자. 바로 20여 년 전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기억’에 관한 영화,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 얘기다. 전직 보험 수사관이었던 주인공(레너드)은 아내가 살해당하는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현재로부터 10분 전까지만 기억하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다. 레너드는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기록을 찾아보고 메모를 해가면서 아내 살해범에 대한 복수 의지를 불태운다. 주인공은 과거가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음에도, 기록을 볼 때마다 끔찍했던 장면이 상기되면서 괴로워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전달하고자 했던 주제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레너드의 끔찍한 과거가 기록에 의해 박제되지 않았다면, 기억 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으리라는 안타까움이 아스라한 잔영으로 남아 있다. 즉 필자가 느꼈던 영화 메멘토는 인간에게 ‘망각’이 항상 불편한 것만은 아니며, 때로는 효능 좋은 진통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이런 망각의 진통 효과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다.

지난 2월 4일 오찬 모임 중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16번째 확진자가 당시까지도 청정 지역이었던 광주에서 발생했다는 문자가 대부분 참석자들의 휴대폰에 동시다발적으로 울렸다. 곧이어 16번 환자의 동선이 일부 가짜 뉴스와 섞여 무분별하게 살포된다. 환자가 머물렀던 병원은 이름조차 생소한 코호트 격리가 시작되고, 2차 감염자까지 확인되면서 광주는 일시에 공포의 도시로 변한다.

시민들의 소비 활동은 크게 위축되고, 여행, 음식, 숙박, 도소매업 등이 큰 타격을 받는다. 중국산 부품 공급 애로로 광주의 대표 기업 기아자동차마저도 이틀간의 휴업 결정을 내린다. 마침내 16번째 확진자 발생 후 불과 엿새만인 2월 10일, 이용섭 광주시장의 주재로 긴급 경제 단체 간담회가 열리고, 지역 경제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긴급 대책이 논의되기에 이른다.

역사는 거울이다.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지역 경제가 신음하고 있는 지금, 과거 사스나 메르스 등 주요 감염병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냉정히 살펴보자. 공통적인 특징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경제는 심리다’라는 명제가 경제 지표에서 뚜렷하게 증명되는 것이다.

전염병 발생 직후에는 시민들의 불안과 언론의 부정적 보도 등이 상호 작용을 일으키면서 공포 기제가 순식간에 작동한다. 소비 심리가 급속히 얼어붙는 것이다. 그러나 전염병이 어느 정도 관리되는 3~6개월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경제 지표는 급반등한다.(‘V자형 회복’)

예를 들어, 사스가 창궐했던 2003년 1분기와 2분기 우리나라 성장률은 각각 -0.7%, -0.2%로 극심한 침체를 겪다가, 안정화된 3분기에는 곧바로 +1.9%로 급반등하였다.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편리한 진통제, 망각이라는 방어 기제 덕분이다.

최근 다시 악화일로에 있는 코로나 19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개인 위생’을 철저히 준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한다. 아울러 필자는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분들께 두 가지만 교훈 삼아 미래에 대비하기를 간곡히 말씀 드린다.

첫째, 전염병에 따른 극도의 경기 침체는 대체로 수명이 그다지 길지 않다는 점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공중 보건 체제를 갖춘 우리나라와 광주시 방역 당국의 노력,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망각’이라는 편리한 방어 장치를 믿자. 어렵지만 희망을 잃지 말고 몇 개월만 버티는 리스크 관리 전략이 유효하다는 뜻이다.

둘째, 최근 들어 전염병이 과거보다 자주 발생하고 있다(사스 2003년, 신종 인플루엔자 2009년, 에볼라 2014년, 메르스 2015년, 코로나19 2019년 등). 더구나 세계 경제가 글로벌 공급 사슬에 의해 더욱 촘촘해진 지금은 전염병이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더욱 커졌다. 전염병을 어쩌다 발생하는 ‘블랙 스완’(검은 백조)쯤으로 치부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야흐로 전염병은 이제 경제의 상수다. 항상 대비하라.

※이정 한국은행 광주전남본부장이 ‘경제 이야기’ 코너로 독자를 만납니다. 이 본부장은 광주·전남 경제 현안과 국내외 경제 이슈 등을 경제·인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칼럼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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