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공동체 정신·인심 담긴 남도음식 ‘천년의 맛’ 자부심
2019년 11월 12일(화) 04:50
<제3부> 전라도, 문화예술 꽃피우다 ⑦ 미향 남도
계절마다 풍부한 재료로 만든 음식
산·들·뻘·바다 버무린 ‘게미진 맛’
조선시대 소설 속 단골 메뉴
담양 죽순, 국내 최초 백과사전에
김치는 기본, 떡갈비·꽃게 요리 등
광주 밥 한끼는 넉넉한 인심

KTX호남선을 타고 온 외지인들에게 인기 만점인 ‘송정 떡갈비’.<광주일보 자료사진>

지난 달 31일 막을 내린 ‘2019 광주디자인비엔날레’ 행사장에는 ‘광주의 맛’이라는 전시가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전시관 모퉁이에 자리잡은 공간에는 참기름으로 버무린 고슬한 밥에 묵은지를 넣고 깨를 뿌려 마무리한 ‘광주 주먹밥’과 당근·오이·단무지 등 갖은 야채를 넣어 미감과 식감을 높인 ‘납작둥글 주먹밥’ ‘3색 주먹밥’ 등이 오랜 관람으로 시장해진 관람객을 유혹하고 있었다.

농촌에서 새참이나 일꾼들의 식사로, 또는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간식, 전쟁통에는 병사들의 식량이었던 주먹밥은 ‘광주 정신’의 상징이 됐다.

‘광주 주먹밥’은 ‘광주 공동체 정신’의 상징이다.<광주일보 자료사진>


1980년 5월, 광주시 동구 대인시장 상인들은 길가 곳곳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시민군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주먹밥을 건넸다. 좁고 어수선한 시장 골목에서 허리 숙여 밥을 짓던 상인들의 모습은 ‘광주 공동체’의 상징적 모습이 됐다.

고단한 일상에 힘을 주는 희망의 음식이라 주먹밥이 주는 의미는 크다. ‘광주 주먹밥’을 디자인한 용미현·이기상·이지연·심솔아 작가는 “한 덩어리의 주먹밥은 나눔을 통해 공동체를 실현한 아름다운 정(情)”이라며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주먹밥에 활기가 넘치고 다양한 문화가 숨쉬는 광주의 이미지를 담아 주먹밥 패키지 디자인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전라도 사람 그 누구라도 자신 있게 내세우는 것이 음식이다. ‘남도다움’을 말할 때 의향·미향·예향을 뜻하는 ‘삼향’(三鄕)으로 압축해 설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라도의 맛과 멋, 풍류는 세월이 가도 그 위상을 잃지 않고 있다.

남도 음식은 일단 ‘게미진 맛’으로 승부를 본다. 이 지역은 산과 평야, 뻘과 바다를 모두 가졌다.

어머니의 산 무등산과 지리산이 감싸고 나주 평야, 순천만 일대와 남서해안을 모두 품었기에 계절마다 풍부한 음식재료들이 한 데 모일 수 있다.

외지 사람이 전라도의 한상 차림을 받아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제철 밑반찬과 계절음식이 상에 꼭 올라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대접하는 밥 한 끼는 그 사람의 정성이다. 전라도 음식은 곧 넉넉한 인심이다.

‘영광 굴비’ ‘홍어 삼합’ ‘동곡 꽃게장’ 등 남도 한정식 상차림은 젓가락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걸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이자겸의 ‘굴비’·최초 백과사전엔 ‘담양 죽순’

청담(淸潭) 이중환(1690~1756)이 1751년 펴낸 지리지 ‘택리지’는 전라도를 가히 “천혜의 고장”이라고 했다.

허균(1569~1618)이 우리나라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한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전라도 일원 ‘대표 맛’이 총망라됐다.

허균은 책에서 “서해안에서 나는 조기·웅어·오징어와 남해의 홍합, 지리산에서 나는 밤·오시·죽실, 전라도 전 지역에서 나는 순채·토란·작설차는 다른 도의 것에 비해 맛이 좋다”고 했다. 영암·함평의 감류·감태, 나주의 숭어·무우·감태, 무안의 감태, 담양의 새앙, 장성이나 담양의 죽순해 등도 들었다.

‘조선시대 유일의 여성 실학자’로 불리는 빙허각 이씨(1759~1824)의 저작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도 전라도 여러 고을의 유명한 먹거리들이 나열돼 있다.

1614년에 이수광(1563~1628)이 편찬한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芝峰類說)에도 전라도 음식은 빠지지 않는다. 담양의 죽순, 화순의 감, 광주의 수박, 동복의 인삼, 순창의 고추장 등이 책을 채웠다.

전라도 음식은 조선 시대 소설의 단골 손님이다.

흥부전의 배경은 전라도다. 층층이 둔 어린 자식들에게 늘어놓는 가난 타령에는 전라도 음식이 구성지게 들린다.

‘열구지탕에 국수 좀 말아 먹었으면’ ‘벙거지골에 고기를 지지고 닭의 알 좀 풀어 먹었으면’ ‘개장국에 흰밥 좀 말아 먹었으면’ ‘대추시루떡에 검정콩 좀 놓아 먹었으면’….

흥부가 제비의 보은으로 잘 살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놀부에게 내어놓은 상차림에 등장하는 음식 이름도 친근하다.

너비아니, 염통산적, 암소갈비, 난사젓, 굴젓, 소라젓, 아가미젓, 수육, 편육, 어회, 동치미, 암치, 약포, 대하, 숭어구이, 전복채 등 스무 가지가 넘는다. 쌀밥과 국을 더하면 ‘상다리 휘어지는’ 전라도 옛 상차림을 상상해 볼 만하다.

1920년대 잡지 ‘개벽’에는 ‘조선자랑’ 특집이 마련됐다.

전라도 상차림에 대해서는 ‘나주 소반에다가 청초한 음식을 내놓는데, 담양 죽순이며 영광 굴비며 전주 누른밥이며 순창 고추장이며 제주 귤이 있다’고 했다.

고려시대 문신 이자겸(?~1126)은 고려 인종 때 영광 법성포에서 귀양살이를 할 시절 이곳 조기의 독특한 맛에 놀란 나머지 그 맛을 두 딸이 왕비로 있는 궁궐에 전하면서 ‘자신은 귀양살이를 하나 비굴하지 않다’는 뜻을 담고자 조기의 이름을 ‘굴비’(屈非)라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허균은 ‘죽순해’를 들어 ‘노령(長城) 이남의 지역에서 잘 만들어 먹는다. 맛이 절묘하게 좋다’고 했다.

◇주먹밥·떡갈비…‘전라도 맛’ 현재와 미래

‘김치 종주도시’를 표방하는 광주에서는 올해 26번째 광주세계김치축제가 지난 달 25~27일 열렸다. ‘광주가 만들고 세계가 맛본다’를 기치로 내건 광주김치에 대한 시민들의 자부심은 여느 지역민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김치와 전통음식, 전국의 발효 음식 장인들이 모인 이번 행사는 방문객 5만여 명을 기록하고 110만 달러(12억7000만원) 수출계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거뒀다.

광주에 오는 타지 손님에게 ‘광주의 맛’을 어떻게 소개할까 하면 갈곳이 너무 많아 머리를 싸매곤 한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다지고 섞어 고소하면서 담백한 맛이 일품인 ‘송정떡갈비’와 꽃게요리를 종류별로 즐길 수 있는 꽃게 전문 음식점이 모여있는 ‘동곡동 꽃게장백반 거리’, ‘커피 일색’인 점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각양각색으로 탈바꿈한 공간이 주는 매력으로 광주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동명동 카페 거리’ 등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맛집이 천지다.

광주시가 깊고 독특한 맛의 메뉴를 선보이고 있는 ‘게미맛집’을 소개한 스토리북 ‘게미맛집 이야기’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먼저 ‘배불리 한 끼 먹고 가면 좋겠다’는 어머니의 푸근한 정을 담아 음식을 파는 50년 역사의 명화식당(오선동) ‘애호박옛날국밥’이 소개된다.

또 볶은 천일염과 고춧가루, 참기름을 섞은 기름장을 삭힌 홍어에 적시고 묵은지, 돼지고기 수육, 된장 찍은 생마늘을 얹은 김가원(쌍촌동)의 ‘홍어삼합’, 제대로 된 맛을 내기위해 된장을 항아리에 2년간 묵혀 만든 매월흑염소가든(매월동)의 ‘흑염소탕’ 등의 이야기를 전한다.

특수한우에 된장을 곁들인 구수하고 시원한 해남성내식당(백운동) ‘한우된장샤브’와 남도의 질펀한 갯벌이 섞인 바다와 황토, 산에서 나는 산물들의 풍성한 맛이 배어 더 게미진 ‘돌담’(금곡동)의 게장백반을 직접 제조하는 주인장들의 목소리도 만나볼 수 있다.

/백희준 기자 bhj@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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