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과거제와 음서제
2019년 09월 19일(목) 04:50
고려와 조선에는 음서제(蔭敍制)가 있었다. 고려는 5품 이상, 조선은 2품 이상 벼슬아치들의 자제들에게 과거를 보지 않고 벼슬에 진출할 수 있는 특혜를 준 것이다. 문벌(門閥) 덕분에 얻은 벼슬이란 뜻에서 문음(門蔭)이라고도 했다. 원래는 한 명만 받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두 명 이상이 혜택을 누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음서로 채용되는 관리를 음관(蔭官), 또는 남행관(南行官), 때로는 백골남행관(白骨南行官)이라고도 불렀다. 남행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다. 국왕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를 하는 남면(南面)을 했다. 그 동쪽에는 문신들인 문반, 서쪽에는 무신들인 무반이 섰는데, 음직은 남쪽에 서서 북향하는 자리라는 뜻이다. 실제로 음관들이 남쪽에 따로 선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백골(白骨), 즉 조상 덕에 벼하는 사람들을 분류하기 위한 용어였다.

조선 후기 유수원(柳壽垣:1694~1755)은 ‘우서’(迂書)의 ‘문벌의 폐해를 논한다’(論門閥之弊)에서 음서제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위하는 데는 다만 인재가 어진가 불초한가만을 물어야 하는데, 지금은 먼저 문벌을 따지니 이것은 어떤 의리인가. 또한 옛날에 귀하게 여긴 것은 충신과 효자의 자손인데, 지금 귀하게 여기는 것은 조상의 관직과 문벌뿐이다.” 이처럼 강한 개혁 성향을 지녔던 유수원은 영조 31년(1755)의 나주벽서 사건과 관련되어 노론에게 사형당했다.

그런데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했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여한은 남기 마련이었다. 순조 때 영의정까지 올랐던 남공철(南公轍)은 정조 8년(1784) 문음으로 정9품 세마(洗馬)가 되었으나 정조 16년(1792) 식년문과에 응시해 급제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음보로 진출한 사람들은 집안이 왕성하기 때문에 과거급제자보다 더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때로는 숭반(崇班) 즉 1품까지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음서로 1품관까지 오른 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임금이 관리를 보내 조문하고 부의하는 조제(弔祭)를 내려 주지 않는 것이 예법이었다. 숙종 6년(1680)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 성직(成稷)이 만 94세로 사망했는데 예조판서는 “음보로서 숭반에 이른 자는 조제를 거행하지 않습니다만 성직은 여러 차례 판부사(判府事)에 의망되었으니 은전(恩典)을 내려야 마땅합니다”라고 상주했다. 숙종 또한 나이가 100세에 가깝고 1품까지 올랐다면서 특별히 조제와 부의를 거행하게 했다. 일종의 특전(特典)을 내려 준 것이다.

지금 조국 법무부장관 딸과 나경원 의원 아들·딸들의 입시 관련 문제가 계속 나오는 것은 일종의 현대판 음서제에 대한 문제 제기다. 대학입시뿐만 아니라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 음서제는 더욱 왕성해졌다. 로스쿨도 그렇고 의학전문대학원도 그렇고 외교 전문 분야 전형도 그렇다. 이런저런 명분을 내걸고 출범했지만 실제로 합격된 사람들 중 일부는 본인이 아닌 부모 능력순이라는 의혹의 눈초리가 따갑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로스쿨 출신 중에 판검사에 임용된 인물들의 부모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혹이 일고 있다. 이런 의혹이 일부라도 사실로 판명 날 경우 그렇잖아도 신뢰도가 낮은 이 나라 사법 체제에 대한 신뢰는 더욱 떨어질 것이다. 의전원의 경우도 그 부모가 의대 교수인 경우가 많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이른바 연줄이 큰 힘을 발휘하는 우리 사회의 경우 대학 진학을 비롯한 모든 시험은 음서제를 전면 폐지하고 과거제로 가는 것이 맞다. 수시를 폐지하고 정시로 가는 대신 가난하거나 농어촌에서 나고 자란 우리 사회의 약자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이 맞다. 로스쿨 대신에 사법시험을 부활하는 것이 맞고, 의대 출신들이 인턴·레지던트를 거쳐 의사가 되는 것이 맞다. 부패가 극심한 우리 사회는 이런저런 명목으로 다른 문을 만들어 놓으면 보나마나 권력과 자본이 있는 자들의 자녀를 위한 문이 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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