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조광윤 당 이후 첫 통일 왕조, 북송 초대 황제
2019년 09월 10일(화) 04:50 가가
조광윤(趙匡胤, 927~976)은 하북성 탁주 고양현 출신으로 북송의 초대 황제다. 묘호는 태조로, 당 왕조 이후 새로운 통일 왕조를 수립했다.
부친은 조홍은으로 오대 십국때 후당의 금군 장교다. 형제들이 요절해 사실상 장남 역할을 수행했다. 940년 군에 들어가 후한의 장군 곽위의 막료가 되었다. 951년 곽위가 후주(後周)를 건국하자 개국 공신이 되었다. 954년 곽위가 사망하자 양자 시영이 2대 황제로 즉위해 조광윤을 중용했다. 교태위전절도감, 금군총장령을 역임했다. 세종 시영이 959년 37세로 죽자 후계자인 공제 시숭훈은 7세에 불과했다. 동생 조광의와 참모 조보 등이 쿠데타를 모의했다. 960년 정월 북한이 침략하자 이를 막기 위해 수도 개봉 주변의 진교에 숙박했는데 군의 간부들이 칼을 들고 마당에서 “원컨대 태위를 추대하여 천자로 삼고자 합니다”고 외쳤다. 간밤의 술기운이 아직 남은 광윤에게 황포(黃袍)를 걸쳐 주었다. 공제의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 송의 태조다. 광윤의 즉위 사실을 접한 화산의 은사 진박은 “천하는 이제부터 안정된다”고 예언했다고 한다.
태조에게 시급한 것은 중앙집권의 강화와 전국의 통일이었다. 중앙의 금군(禁軍)을 강화하고 각 지방의 지휘관들로부터 병권을 회수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961년 8월 태조는 주요 장군들을 주연에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병권을 내놓고 지방의 절도사로 갈 것을 제안했고, 장군들은 황제의 제안을 수용했다. “술잔을 돌려 병권을 해제했다”는 유명한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의 일화다. 황제 직속의 금군 강화도 불가피했다. 그러나 중앙군의 강대한 지휘권이 남용되지 않도록 전전도점검과 부도점검을 폐지했다. 재위기간 중 군대 규모는 계속 늘어났다. 970년대 22만명에서 치세 말에는 37만8000명으로 늘어났다. 북방의 영토 안정과 남방의 왕조 통합을 위해 불가피했다.
재상 조보의 건의를 받아들여 남쪽을 먼저 공략하고 북쪽은 나중에 공격하는 선남후북(先南後北)의 통일정책을 채택했다. 쉬운 것을 먼저하고 어려운 것을 나중에 하는 선이후난(先易後難)의 전략이다. 화가 유준은 태조가 눈 오는 밤에 황궁을 빠져나와 조보의 집을 방문하는 설야방보도(雪夜訪普圖)를 생동감있게 묘사했다. 실제로 전국의 통일은 태종때인 979년에 완성되었다. 965년 사천의 후촉 정벌이 추진되었다. 971년 광동성과 광서성의 남한이 975년에는 남경을 근거지를 둔 남당이 정벌되었다.
절도사의 권한을 서서히 축소하였다. 절도사 부대 중 우수한 자를 중앙으로 끌어올렸다. 진장이 담당한 경찰업무를 중앙에서 현위(縣尉)를 직접 파견해 절도사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절도사가 한 곳에 오래 재임하지 못하도록 해 지방의 유력자가 되는 것을 방지했다. 중앙에서 통판(通判)을 보내 전곡 업무를 담당하였고 전운사를 두어 그간 절도사의 권한이었던 조세와 염세 등 징세 업무를 담당토록 했다. 당의 절도사가 사실상 ‘총독’의 권한을 휘두른 것을 정상화 시킨 조치라 할 수 있다.
오대의 무인정치를 문인정치로 바꾼 것도 커다란 업적이었다. 경찰업무가 진장에서 현위로 넘어가고 전운사, 통판 등의 직책이 생기면서 직업관료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과거합격자 즉 진사(進士) 출신이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진사 출신이 아니면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태조때 350명이 급제했고 태종때 진사 제도의 기반이 구축되었다. 정부 조직은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으로 구성되었고 독립적인 추밀원도 중서성에 맞먹는 권한을 가졌다.
976년 50세의 나이로 급서했다. 태조가 동생 조광의와 밀담을 나눈 직후 사망했다. 동생이 형을 도끼로 살해했다는 촉영부성(燭影斧聲)의 고사가 여기서 유래했다. 그러나 모친 두태후 임종시 동생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금궤지맹’의 고사도 있어 암살설의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조광의가 태종으로 즉위한 직후 태조의 두 아들은 요절했다. 태조는 피를 흘리지 않고 점진적이고 온건하게 문치의 전통을 확립한 명군이었다.
부친은 조홍은으로 오대 십국때 후당의 금군 장교다. 형제들이 요절해 사실상 장남 역할을 수행했다. 940년 군에 들어가 후한의 장군 곽위의 막료가 되었다. 951년 곽위가 후주(後周)를 건국하자 개국 공신이 되었다. 954년 곽위가 사망하자 양자 시영이 2대 황제로 즉위해 조광윤을 중용했다. 교태위전절도감, 금군총장령을 역임했다. 세종 시영이 959년 37세로 죽자 후계자인 공제 시숭훈은 7세에 불과했다. 동생 조광의와 참모 조보 등이 쿠데타를 모의했다. 960년 정월 북한이 침략하자 이를 막기 위해 수도 개봉 주변의 진교에 숙박했는데 군의 간부들이 칼을 들고 마당에서 “원컨대 태위를 추대하여 천자로 삼고자 합니다”고 외쳤다. 간밤의 술기운이 아직 남은 광윤에게 황포(黃袍)를 걸쳐 주었다. 공제의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 송의 태조다. 광윤의 즉위 사실을 접한 화산의 은사 진박은 “천하는 이제부터 안정된다”고 예언했다고 한다.
절도사의 권한을 서서히 축소하였다. 절도사 부대 중 우수한 자를 중앙으로 끌어올렸다. 진장이 담당한 경찰업무를 중앙에서 현위(縣尉)를 직접 파견해 절도사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절도사가 한 곳에 오래 재임하지 못하도록 해 지방의 유력자가 되는 것을 방지했다. 중앙에서 통판(通判)을 보내 전곡 업무를 담당하였고 전운사를 두어 그간 절도사의 권한이었던 조세와 염세 등 징세 업무를 담당토록 했다. 당의 절도사가 사실상 ‘총독’의 권한을 휘두른 것을 정상화 시킨 조치라 할 수 있다.
오대의 무인정치를 문인정치로 바꾼 것도 커다란 업적이었다. 경찰업무가 진장에서 현위로 넘어가고 전운사, 통판 등의 직책이 생기면서 직업관료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과거합격자 즉 진사(進士) 출신이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진사 출신이 아니면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태조때 350명이 급제했고 태종때 진사 제도의 기반이 구축되었다. 정부 조직은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으로 구성되었고 독립적인 추밀원도 중서성에 맞먹는 권한을 가졌다.
976년 50세의 나이로 급서했다. 태조가 동생 조광의와 밀담을 나눈 직후 사망했다. 동생이 형을 도끼로 살해했다는 촉영부성(燭影斧聲)의 고사가 여기서 유래했다. 그러나 모친 두태후 임종시 동생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금궤지맹’의 고사도 있어 암살설의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조광의가 태종으로 즉위한 직후 태조의 두 아들은 요절했다. 태조는 피를 흘리지 않고 점진적이고 온건하게 문치의 전통을 확립한 명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