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에 대해 생각한다
2019년 08월 26일(월) 04:50 가가
거짓말 없는 하루, 가능할까? 거짓말을 엄밀하게 이해한다면 불가능하다. 거짓말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만을 말하고 듣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거짓말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라고 말한다. 일상적인 수많은 말과 표현들이 따지고 보면 사실은 거짓말이다.
소위 예의와 사회적 관계를 위한, 또는 직업적이고 습관적인 좋은 말들은 ‘선의의 거짓말’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두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착한 거짓말과 나쁜 거짓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나쁜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런 구별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어떤 거짓말에 대해서는 화를 내고 비판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동의하거나 맹목적으로 지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거짓말은 예외 없이 일정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이고 일상적인 거짓말은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하거나 걱정을 하게 하고 원하지 않는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하는 것이다.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더 큰 비난을 받기 쉽다. 거짓말이 미치는 결과와 이에 대한 이해관계에 따라서 거짓말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달라진다는 의미다.
이와는 달리 거짓말에 대해서 아주 철저하고 엄격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다. 거짓말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다. 왜냐 하면 목적과 결과에 상관없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거짓을 말하는 것 그 자체가 옳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거짓말은 없다.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다.
칸트와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거짓말 그 자체가 아니고 거짓말의 동기와 결과다. 그래서 거짓말을 한 행위보다는 그 거짓말의 결과가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서 옹호하거나 적대감을 갖는다. 거짓말의 결과가 ‘나’에게 미치는 파장이 거짓말에 대한 판단과 평가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이해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무관심하거나 구경하는 태도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무관심은 더 위험하다. 거짓말하는 의도의 본질은 사람들의 관심 방향을 비틀어서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듣는 사람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동의를 통해서 확대 재생산되며 진실보다 더 진실처럼 보이는 순간 다수의 이름을 가지고 거대한 권력이 된다. 숱한 역사적 경험들이 이를 증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의 이름으로 공익을 위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사실은 개인의 이해관계를 깊숙하게 건드리는 이유가 있다. 거짓말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진실에 대한 뿌리 깊은 무관심 그리고 거짓말에 속는 사람들의 열렬한 동의를 통해서 ‘진실’을 만들어 내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이 방식의 작동에는 사적 혹은 공적인 영역에서 예외가 없다.
우리 모두가 칸트처럼 엄격한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사실 어렵다. 우리는 가족을 안심시키고 친구와 이웃을 격려하며 그저 위로하고픈 마음에서 ‘선의의 거짓말’을 문득문득 한다. 하지만 ‘나쁜 거짓말’은 계산되고 조직적이고 구조화된다. 상대방에게 힘을 행사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착하기 위해서 ‘사실과 진실들’을 가공하고 생산한다.
이러한 거짓말들의 최종 목적은 공동체와 관계의 신뢰 파괴다. 신뢰라는 것 자체가 완전히 ‘헛소리’라고 믿게 함으로써 거짓말 너머에 숨겨진 진실을 생각할 수 없게 한다. 사실 거짓말을 가려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대놓고 마구잡이로 해 대는 거짓말은 당당하기조차 해서 더 힘들다. 이럴 때는 소크라테스의 길을 생각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세상의 거센 비난에도 흔들림 없이 오직 ‘다이몬’이라고 하는 내면의 양심이 하는 소리에 따라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고자 했다.
거짓말이 거침없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명예와 권력과 재화의 축적에만 여념이 없는’ 자들의 거짓말 너머에 있는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밝은 눈으로 혼탁의 바닥을 응시해야 할 때다.
칸트와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거짓말 그 자체가 아니고 거짓말의 동기와 결과다. 그래서 거짓말을 한 행위보다는 그 거짓말의 결과가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서 옹호하거나 적대감을 갖는다. 거짓말의 결과가 ‘나’에게 미치는 파장이 거짓말에 대한 판단과 평가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이해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무관심하거나 구경하는 태도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무관심은 더 위험하다. 거짓말하는 의도의 본질은 사람들의 관심 방향을 비틀어서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듣는 사람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동의를 통해서 확대 재생산되며 진실보다 더 진실처럼 보이는 순간 다수의 이름을 가지고 거대한 권력이 된다. 숱한 역사적 경험들이 이를 증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의 이름으로 공익을 위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사실은 개인의 이해관계를 깊숙하게 건드리는 이유가 있다. 거짓말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진실에 대한 뿌리 깊은 무관심 그리고 거짓말에 속는 사람들의 열렬한 동의를 통해서 ‘진실’을 만들어 내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이 방식의 작동에는 사적 혹은 공적인 영역에서 예외가 없다.
우리 모두가 칸트처럼 엄격한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사실 어렵다. 우리는 가족을 안심시키고 친구와 이웃을 격려하며 그저 위로하고픈 마음에서 ‘선의의 거짓말’을 문득문득 한다. 하지만 ‘나쁜 거짓말’은 계산되고 조직적이고 구조화된다. 상대방에게 힘을 행사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착하기 위해서 ‘사실과 진실들’을 가공하고 생산한다.
이러한 거짓말들의 최종 목적은 공동체와 관계의 신뢰 파괴다. 신뢰라는 것 자체가 완전히 ‘헛소리’라고 믿게 함으로써 거짓말 너머에 숨겨진 진실을 생각할 수 없게 한다. 사실 거짓말을 가려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대놓고 마구잡이로 해 대는 거짓말은 당당하기조차 해서 더 힘들다. 이럴 때는 소크라테스의 길을 생각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세상의 거센 비난에도 흔들림 없이 오직 ‘다이몬’이라고 하는 내면의 양심이 하는 소리에 따라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고자 했다.
거짓말이 거침없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명예와 권력과 재화의 축적에만 여념이 없는’ 자들의 거짓말 너머에 있는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밝은 눈으로 혼탁의 바닥을 응시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