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김진구 일신중 교감] 길 하나 건너는 나그네
2019년 08월 13일(화) 04:50
교정에 둘러있는 느티나무에서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운동장에는 학생들의 발자국 대신 빗물에 씻긴 흔적 위로 잡초가 돋아 있다. 방학이 깊어가는 모습이다. 참 무상하다. 학생, 교사, 학부모가 어울려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학생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복도가 휘어질 듯 활기차던 학교가 적막강산이다. 한 번씩 순회하고 나면 쓸쓸한 생각이 든다. 신발장에는 수 년 전에 붙인 색깔 바랜 번호표가 42번까지 있다. 지금은 20명 안팎이니 학생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대학이 벚꽃 피는 순서대로 지방부터 폐교될 것이라고 하지만, 초·중등학생 수는 벚꽃 떨어지는 것처럼 급감하고 있다.

출근길 학교 앞 사거리도 방학 분위기여서 한산하다. 그런데 노란 모자, 노란 조끼 차림의 노인 네 분이 신호등의 색깔에 따라 노란 깃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구청 노인회에서 나온 분들이다. 이 더위에 학생은 물론 행인도 드문데 길거리 사각 모서리에 서 있는 모습이 영 아니다 싶었다. 학교에 차를 주차하고 음료수를 챙겨서 갔더니 “집에서 노느니 소일 삼아서 활동한다”며 밝게 웃으셨다.

이와 같은 교통 안전 도우미 말고도 학교에는 할머니 두 분이 일주일에 두세 번 화장실 청소를 해주신다. 한 달에 10일간 이렇게 교통 지도와 청소를 하면 노인 복지 차원에서 30만 원 정도를 국가가 지급한다. 연세가 70대 중반이 한 분이고, 다섯 분은 모두 80세가 넘었다. 아이는 줄고 노인은 늘어가는 우리 사회의 실상인데 앞으로는 더욱 기울어질 것이다. 용돈도 벌고, 손주들에게 선물도 줄 수 있다는 당당함(?)도 좋아 보였지만, 몸과 정신이 온전하여 본인의 의지대로 활동할 수 있는 복 받은 분들이라고 생각되었다.

방학 동안 노인주간보호센터에 봉사 활동을 몇 번 갔다. 하모니카 동호회에서 단체로 연주를 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찾아가 하루 내내 함께 생활도 했다. 말이 위문 공연이고 봉사 활동이지 사실은 미래의 체험이란 표현이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루 8시간 40여 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비율이 1대3 정도였고 나이는 70대 초반에서 100세까지 다양했다. 앉아서 손발을 움직이는 건강 체조를 시작으로 종이 접기, 미술 치료, 물리 치료, 점심 후 낮잠 등 하루 일정이 촘촘했다. 나는 하모니카로 가요 몇 곡 연주하고, 송가인이 불러서 전국을 들썩인 ‘한 많은 대동강’, ‘용두산 엘레지’ 노래도 불렀다. 음악은 사람과 사람을 가장 빠르게 이어주는 본능의 매개체인가. 환한 얼굴로 박수를 치고, 손이 불편하면 발로 장단을 맞추고, 손발 모두가 움직이기 힘든 분은 온몸으로 흥겨워하였다.

노인주간보호센터를 노치원(老稚園)이라 부르기도 한다. 유치원(幼稚園)에 빗대서 나온 명칭이다. 아이가 자라 상승 곡선으로 청장년의 정점에 이른 후 하향 곡선으로 노인이 되는 대칭 구조의 인생이다. 유모차를 탔다가 실버카로 갈아탄다. 식사를 도와줘야 하고, 놀이 학습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낮잠을 자는 것은 비슷하지만 유치원은 부모 손잡고 등원하고, 노치원은 자녀 손잡고 등원하는 차이랄까. 대체로 몸이 불편하거나, 정신이 맑지 못한 분들로 아픈 현상은 단순하지만 등원하게 된 사연은 가지가지이다. 너무나 적적해서 대화를 하기 위해, 낮 시간이나마 간병에 지친 가족들을 위해, 직장 생활로 돌볼 사람이 없어서, 치매 진행을 늦추거나 간단한 물리 치료를 위해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노치원의 장점은 낮 시간을 이렇게 함께 지내다가 저녁이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녀나 보호자들도 모시지 못한 자괴감이 덜하다.

도로 건너편에 유치원이 있다. 아이들이 하원 준비를 한다. 선생님과 배꼽 인사를 하고 손 흔들며 노란 차에 오른다. 이곳 노치원도 귀가 시간이다. 인생은 길 하나 사이를 두고 유치원에서 노치원으로 건너오는 나그네다. 한평생 길 하나를 건너는데 걸리는 시간은 제각각이지만 마무리는 이렇게 비슷하다. 오늘은 내가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지만 머지않아 이 어르신들이 짚불 사라지듯 가시고 나면 저 자리에 우리들이 앉아 있을 것이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가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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