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회강’의 저자 노촌 임상덕
2019년 08월 12일(월) 04:50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우석대 석좌교수]

읽고 또 읽어도 싫지 않고,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글은 다산 정약용의 글이다. 그래서 나는 평생 다산의 책을 읽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종족(宗族)이 대대로 수십여 집이 함께 살면 한 고을에서 선망을 받는다. 그런데 그중에 학자가 한 사람도 없으면 이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제자 정수칠에게 당부한 글)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를 이루고 떼 지어 살아가는 문중에 학자 한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했으니, 곰곰이 따져 보면 깊은 의미가 있는 말이다.

학자 한 사람도 배출하지 못한 문중이면서 잘난 체 얼굴을 내밀고 고개를 들어 마을을 누비고 다니니 부끄러운 일이요, 집안의 소년들이나 후생들이 본받을 사람이 없어 도의에 어긋난 말을 하고 어리석고 망령된 짓만 하게 된다고 하였다. 옳은 말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모두의 존경을 받을 학자가 나오기를 그렇게도 바라고 또 희망하였다. 모범을 보여 줄 집안의 학자 어른이 없고서는 별 볼 일 없는 집안으로 추락될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 호남에는 명문 집안이 많았으니 그 집안마다 대표적인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에 명문거족으로 촉망을 받기에 이르렀다. 나주의 회진에 기반을 둔 나주 임씨 또한 대표적인 명문이다. 사는 지역이 회진(會津)이라는 명촌이어서 세상에서는 ‘회진 임씨’라고 호칭하는데 인물과 학자를 많이 배출한 집안이었다. 문학가로는 백호 임제, 높은 벼슬로는 이조판서를 지낸 충익공 임담, 학자로는 창계 임영, 노촌(老村) 임상덕(林象德·1683∼1719)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다만 임상덕은 회진 임씨였으나 이웃 고을인 무안의 이산리(梨山里)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무안의 인물이자 학자로 여기고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나는 1985년 우리 고향 출신 임상덕의 문집인 ‘노촌집’(老村集)을 해제하여 영인본으로 간행하는 일을 도운 적이 있다. 노촌집을 해제하면서 본격적으로 관료이자 역사학자였던 노촌의 학문과 사상, 천재적 소양을 바탕으로 저작된 탁월한 역사책 ‘동사회강’(東史會綱)이라는 대저를 남겼음까지 알게 되었다. 10권 5책으로 된 노촌집은 노촌의 학문적 깊이와 사상의 탁월함을 알려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책이었다. 당시 실학사상이 역사의 표면에 등장하지 않은 때였지만 노촌의 생각은 벌써 실학적인 사고가 많아 실학사상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상가로 나는 그 책의 내용을 규정하였다.

2017년 10월 30일 목포대학교에서는 노촌의 학문과 사상 및 ‘동사회강’에 대한 토론을 벌이는 학술대회가 개최된 바 있다. 나는 그때에도 ‘기조발제’를 맡아 노촌 같은 큰 학자, 역사가가 세상에 널리 현양되지 못했음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래도 호남의 옛날 학자로서 학술대회를 통해 학문과 사상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었던 것 또한 경하할 일이었다.

‘동사회강’은 27권 10책의 방대한 역사책이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대단한 책이다. 우리는 역사책이라면 안정복(1712∼1791)의 ‘동사강목’만 알고 있는데, 노촌이 30세에 저술한 ‘동사회강’은 안정복이 태어났던 1712년의 작품이다. ‘동사강목’은 전적으로 ‘동사회강’의 영향을 받아 저술되었으니 노촌의 업적이 얼마나 선구적인 일인가. 50년 전에 ‘동사회강’이 저작되어 조선 역사학의 선구적인 구실을 했던 점만으로도 노촌은 크게 찬양을 받아야 할 학자이자 역사가였다.

노촌은 분명 천재였다. 그것도 매우 부지런하고 빈틈없이 학문에 온 정력을 바친 천재였다. 17세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23세에 문과에 장원급제, 그 뒤 호당(湖堂)에 들어가는 영예를 얻었고, 또 호당 응제에서도 수석을 차지했다. 겨우 벼슬을 시작한 지 14년이 되던 해 37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요절한 천재. 그만한 학자가 명이 길어 더 오래 생존했다면 얼마나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인가. 안타까운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데, 직계 후손들이 번창하지 못했음 또한 애석한 일이었다.

다행한 일은 그의 저서가 그대로 남아 있고 ‘동사회강’도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제 자주 학술대회도 열고, 현양 사업도 펼쳐서 천재 학자의 업적이 세상에 더 알려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만 한 학자가 배출되어 집안을 빛나게 해 주었으니 문중에서도 마음을 기울여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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