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영의 한국영화 100년] <10> 1960년대 청춘영화와 ‘맨발의 청춘’
담배연기 가득한 댄스홀·가죽잠바 트위스트 김의 현란한 춤…당시 젊은이들의 문화코드 보여줘
‘맨발의 청춘’ ‘청춘교실’ ‘가정교사’ 등 청춘영화 흥행
기성사회에 대한 반항·젊은세대 정서 반영… 관객들 열광
청춘의 아이콘 신성일·엄앵란, 영화같았던 세기의 결혼식
1964년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신성일·엄앵란 커플.
2019년 05월 22일(수) 00:00
1963년을 전후로 해서 한국영화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청춘영화’라고 명명된 영화들이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던 것이다. ‘청춘교실’(1963)로 시작해서 ‘맨발의 청춘’(1964)으로 정점을 찍었던 이 시기의 청춘영화는, 해방 전후에 출생해 미국 대중문화에 익숙했던 4·19세대 중심의 젊은 관객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이들 영화는 기성사회에 대한 반항심을 기조로 도시 젊은이들의 사랑, 젊은 세대의 욕구불만, 성공에 대한 야망과 좌절을 서사의 큰 줄기로 삼았다. 그리고 당시 청춘영화들은 서구적 의상과 장신구, 음악 감상실이나 댄스홀, 오토바이, 자동차, 트위스트, 로큰롤 등 젊은이들의 문화를 대변하는 기호들이 영화 속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

이 시기 청춘영화의 서막을 연 영화는 ‘청춘교실’(1963)이었다. 일본의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 ‘그 녀석과 나’를 영화화 한 김수용 감독의 작품으로, 이성간의 교제를 반대하는 부모들에 반발하는 청춘 남녀들의 낭만과 방황을 그리고 있다. 오픈카와 파티장 그리고 해변의 별장 등 서구적인 생활방식이 영화 속에 등장하고 있고, ‘신성일, 엄앵란 콤비’가 주인공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 광화문에 위치해 있던 아카데미극장이 한국영화전용관으로 전향한 이후 개봉한 첫 작품으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이러한 고무된 분위기는 청춘영화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말띠 여대생’(1963, 이형표)도 청춘영화의 대열에 합류했다. 여대 기숙사에 머물고 있는 엄앵란, 최지희, 남미리, 방성자 등 네 명의 말띠 여대생과 말띠 사감 황정순과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신성일, 남석훈 등 미남 스타들이 출연했다. 그리고 청춘남녀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는 등 젊은이들의 풍속도가 경쾌하게 담기기도 했다.

‘가정교사’(1963)는 김기덕이 연출한 청춘영화로 ‘청춘교실’의 작가인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 ‘태양이 비치는 언덕’을 한국의 상황에 맞게 각색한 작품이었다. 이복형제인 형(윤일봉)과 동생(신성일)이 갈등하고, 이들 사이에서 형제간의 우애에 금이 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혜란(엄앵란)의 모습이 담긴 영화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 성공하며 이후 일본의 원작을 가져다가 한국의 상황에 맞게 각색하는 영화들이 양산됐다.

‘맨발의 청춘’(1964, 김기덕) 역시 일본영화를 원작으로 했다. 야쿠자 청년과 외교관 딸 사이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는 ‘진흙투성이의 순정’(나카히라 코우, 1963)이 바로 그 영화다. 1964년 2월 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한 ‘맨발의 청춘’은 첫 날 첫 회부터 관객이 몰렸다. 두수(신성일)는 조직폭력단의 일원으로 밀수품을 운반하던 중에 외교관의 딸 요안나(엄앵란)를 구해주게 되고, 요안나는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두수를 감싸주며 두 사람은 만남을 지속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요안나 가족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고, 두수와 요안나는 함께 죽는 것을 선택하며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사랑을 완성한다.

‘맨발의 청춘’에 등장하는 담배 연기 가득한 댄스홀, 두수의 방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할리우드 여배우의 사진, 가죽 잠바를 입은 트위스트 김의 현란한 춤 등 이 영화는 당시 젊은이들의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맨발의 청춘’은 훗날 표절시비에 휘말리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과의 국교가 없었고, 표절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던 시절에 한국의 영화인들 중 일부는 일본영화 속의 장면과 설정들을 슬쩍 베끼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맨발의 청춘’이 가지고 있는 매력, 그리고 그 시절 이 영화에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의 정서적인 울림은 함부로 폄하할 수 없다. ‘맨발의 청춘’은 당대의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먼저, 신성일의 매력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슬픔도 한 숨도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리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의 목숨을 걸었다”로 시작하는 이봉조 작곡 최희준 노래의 주제가 역시 잊을 수 없는 명곡이다. 여기에다 영화의 엔딩에서 동반자살로 사랑을 완성한 두 사람이 각각 달구지와 영구차에 실려 가는 모습을 통해 계급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연출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리고 이때 거적에 덮인 채 달구지에 실려 가는 두수의 맨발이 삐져나온 장면은 당시의 관객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제시되며 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맨발의 청춘’은 이 시기 청춘영화의 결정판이었으며, 이 영화를 배제한 채 한국의 대중영화를 얘기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다.

‘맨발의 청춘’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학사주점’(1964, 박종호)이 개봉했다. 역시 신성일, 엄앵란 콤비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였다. 가난에 쫓기던 주인공 대학생(신성일)이 학사주점을 차리고 근근이 살아가던 중 갑부의 딸(엄앵란)을 만나 사귀게 되고, 자신의 실수로 갑부의 딸이 절교를 선언하자 고층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한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이 시기 청춘영화들의 레퍼토리 중 하나는 빈민층 청년들이 상류층 여성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꾀하고자 하지만 좌절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 시기 청춘영화에 있어서 신성일, 엄앵란 콤비의 활약은 절대적이었다. 두 사람은 1962년 ‘특등신부와 삼등신랑’에서 연기 호흡을 맞춘 이후, 1963년 ‘청춘교실’, ‘가정교사’, ‘말띠여대생’등 7편을 함께 했고,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을 포함한 23편에서 호흡을 맞췄다. 그리고 두 사람은 1964년 11월 14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엄앵란은 결혼과 동시에 스크린을 떠났다. 이후 엄앵란의 공백은 문희, 남정임, 태현실, 고은아가 대신했다. 가령, 자동차 정비공 철수(신성일)와 주 프랑스대사관의 가정부 영희(문희)가 서로의 신분을 속이고 신분상승을 꿈꾸는 이야기인 ‘초우’(1966, 정진우)에서 엄앵란의 자리는 문희가 차지했다. 이 영화를 통해 당시 19살이던 문희는 스타로 등극했다.

청춘영화는 1967년까지 최고의 흥행 장르로 군림했다. 당시 청춘영화들에 젊은 관객들이 열광하고 환호했던 것은 그만큼 그들의 정서와 욕망을 잘 반영했기 때문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