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학자 고산 윤선도
2019년 03월 18일(월) 00:00 가가
‘장가(長歌)는 송강 정철, 단가(短歌)는 고산 윤선도’라는 말은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널리 알려진 말이다. 우리나라 가사(歌辭) 문학에는 장가와 단가가 있는데, ‘관동별곡’ 같은 장가에는 당연히 송강이 으뜸이요, ‘오우가’와 같은 단가에는 고산이 최고봉이라는 뜻이 담긴 말이다.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가/ 구천(九泉)에 뿌리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 ‘오우가’(五友歌) 중 소나무를 읊은 시조이다.
모든 꽃들이 더우면 꽃을 피우고 추우면 잎이 지거늘, 소나무는 더위와 추위도 모르고 사시장철 푸르게만 살아가니, 그것이 좋아서 벗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지조를 거기에서 알 만하다. 아무리 더워도 아무리 추워도 일반 식물처럼 변하지 않고, 뿌리를 구천에 내리고 절대로 변치 않는 의기를 지닌 시인이 고산이었다. 고산은 26세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의 신분으로 1616년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 시절의 패악한 시대에 권력을 농단하던 이이첨·박승종·유희분 등 권신들의 횡포를 탄핵한 무서운 상소였다. 규탄을 받은 권신들이 가만히 있을 리 있겠는가. 정철·박인로와 함께 조선 3대 가인(歌人)이던 윤선도는 권력에 쫓겨 함경도의 경원이라는 머나먼 곳으로 귀양을 갔다.
경원에서 유배지를 경상도 바닷가의 기장으로 옮겨 살던 고산은 8년 만인 1623년에야 귀양살이가 풀렸다.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반정이 일어난 덕택이었다. 여러 벼슬이 내렸지만 모두 사양하고 낙향, 고향 해남에서 은거하던 고산은 1628년 42세의 늦은 나이로 과거에 응시하여 보란 듯이 장원급제에 올랐다.
뒷날 효종이 된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고 제왕학을 제대로 가르쳐 천하에 유명한 임금의 스승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만큼 고산의 학문은 깊고 넓었다.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바른 말과 옳은 행동 때문에 높은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고향에서 의병을 모아 강화도로 진격하다가 화의 소식을 듣고는 낙망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이어 다시는 부끄러운 나라에서 벼슬을 않겠노라고 제주도로 들어가다가 중간의 보길도 경치에 끌려 그곳에서 은거하고 말았다.
격자봉 아래에 부용동을 만들고, 낙서재라는 서당을 짓고, 세연정이라는 천하절경의 정원을 꾸려 시조를 짓고 읊으며 가인 생활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반대파들은 임금을 호종하지 않고 그냥 낙향했다고 모함하였다. 결국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을 가서 1년을 지냈다. 뒤에 동부승지·예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마침내 본격적인 당파 싸움에 진입한다. 1659년 효종의 붕어로 대비의 복제(服制)에 다툼이 일어났으니 남인 대표 윤선도와 노론의 대표 송시열의 대결이다. 예학자이던 고산은 세력에 밀려 패하고 73세에 다시 귀양길에 올라 1660년에서 1667년에 이르는 긴 세월동안 삼수라는 극지에서 살아야 했다.
경전(經傳)과 사서(史書)에 밝은 학자요, 예학자이던 그의 뛰어난 학문은 세상에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바른 말, 옳은 주장 때문에 그렇게 오랜 귀양살이를 했던 직신(直臣)이라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오우가’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등의 뛰어난 시조 시인임만 알려졌으니, 우리 모두의 공부가 그렇게 짧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아야겠다. 효종의 대군 시절 스승으로 임금의 사부였으며, 효종의 임금 시절 문과에 장원급제한 인물이었으니, 그냥 있기만 했어도 고관대작에 오를 수 있음은 당연했다. 하지만 옳은 말을 하기 좋아하고, 바른 일에만 열을 올려 불의와 비리에는 촌보의 양보가 없던 그의 기개 때문에 겨우 예조참의라는 벼슬에 그쳤다. 그가 얼마나 곧고 바른 직신이었느지 바로 알게 된다.
고산이 세상을 떠난 뒤인 1675년 마침내 남인들이 세력을 잡은 때에야 이조판서라는 벼슬에 추증되고 충헌(忠憲)이라는 시호가 내려 그의 영혼을 위로해 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왕대밭에 왕대가 난다고, 해남 윤 씨 고산의 가문에서는 참으로 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3재 화가인 공재 윤두서를 비롯해 낙서 윤덕희·청고 윤용 등의 3대(代) 문인화가가 있는가 하면 실학자 정약용은 바로 공재 윤두서의 외증손이었다. 고산 윤선도의 핏줄은 호남에 의기를 심어 주었고, 학문의 뿌리를 내려 자랑스러운 유산을 남겨 주었다.
격자봉 아래에 부용동을 만들고, 낙서재라는 서당을 짓고, 세연정이라는 천하절경의 정원을 꾸려 시조를 짓고 읊으며 가인 생활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반대파들은 임금을 호종하지 않고 그냥 낙향했다고 모함하였다. 결국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을 가서 1년을 지냈다. 뒤에 동부승지·예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마침내 본격적인 당파 싸움에 진입한다. 1659년 효종의 붕어로 대비의 복제(服制)에 다툼이 일어났으니 남인 대표 윤선도와 노론의 대표 송시열의 대결이다. 예학자이던 고산은 세력에 밀려 패하고 73세에 다시 귀양길에 올라 1660년에서 1667년에 이르는 긴 세월동안 삼수라는 극지에서 살아야 했다.
경전(經傳)과 사서(史書)에 밝은 학자요, 예학자이던 그의 뛰어난 학문은 세상에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바른 말, 옳은 주장 때문에 그렇게 오랜 귀양살이를 했던 직신(直臣)이라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오우가’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등의 뛰어난 시조 시인임만 알려졌으니, 우리 모두의 공부가 그렇게 짧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아야겠다. 효종의 대군 시절 스승으로 임금의 사부였으며, 효종의 임금 시절 문과에 장원급제한 인물이었으니, 그냥 있기만 했어도 고관대작에 오를 수 있음은 당연했다. 하지만 옳은 말을 하기 좋아하고, 바른 일에만 열을 올려 불의와 비리에는 촌보의 양보가 없던 그의 기개 때문에 겨우 예조참의라는 벼슬에 그쳤다. 그가 얼마나 곧고 바른 직신이었느지 바로 알게 된다.
고산이 세상을 떠난 뒤인 1675년 마침내 남인들이 세력을 잡은 때에야 이조판서라는 벼슬에 추증되고 충헌(忠憲)이라는 시호가 내려 그의 영혼을 위로해 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왕대밭에 왕대가 난다고, 해남 윤 씨 고산의 가문에서는 참으로 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3재 화가인 공재 윤두서를 비롯해 낙서 윤덕희·청고 윤용 등의 3대(代) 문인화가가 있는가 하면 실학자 정약용은 바로 공재 윤두서의 외증손이었다. 고산 윤선도의 핏줄은 호남에 의기를 심어 주었고, 학문의 뿌리를 내려 자랑스러운 유산을 남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