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광주’ 대표하는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거듭난다
2019년 02월 18일(월) 00:00
오늘 리모델링 기공식…광주 현대사 중심 전일빌딩
1968년 준공 ‘호남언론의 종가’ 옛 광주일보 사옥
도심 랜드마크·구도심 활성화 활용 광주도시공사 매입
2016년 총탄 흔적 발견 ‘5·18 헬기기총사격’ 현장
3·1절 마라톤, 호남예술제 등 다양한 문화행사 열려
484억 들여 5·18 40주년 앞둔 내년 3월 재개관

1996년 10월의 전일빌딩. 구도심의 중심건물로서의 위상을 가졌으나 이후 쇠락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금남로 1가 1번지 전일빌딩은 예향의 심장이자, 시민 의견 표출의 장이었다. 1968년 준공돼 50년 이상 광주의 중심시가지인 금남로를 지킨 전일빌딩에는 방송국, 잡지사, 도서관, 미술관, 연구소 등이 입주해 있는 등 당시로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미디어문화복합건물이었다. 금남로의 시작점과 지금의 5·18민주광장의 접점에 자리한 까닭에 민주를 바라는 시민, 그리고 외지인들의 시위와 집회가 반복됐으며, 그래서 모두의 시선이 모이고, 그 외침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전일’이라는 명칭은 전남일보(광주일보의 전신)라는 신문의 이름을 줄인 것으로, 따라서 호남 언론사의 산 역사였다. 금남로를 비롯한 구도심의 쇠락, 신문 산업의 쇠퇴 등은 전일빌딩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62년부터 전일빌딩에 자리했던 광주일보가 42년만인 2004년 맞은편 무등빌딩으로 이전하면서 과거 위상이 흔들렸고 결국 2011년 경매에 넘어갔다. 광주 현대사의 중심에 위치했다는 장소성,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인접한 곳에 자리하여 미래 활용가치가 높다는 점, 도심 랜드마크로 구도심 활성화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해 광주도시공사가 낙찰 받으면서 공공기관 소유 건물로 거듭났다.

전일빌딩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2016년의 일이다. 광주시는 리모델링을 하기로 결정했으나, 10층에서 총탄 흔적 100여 개가 발견되면서 의혹으로만 제기됐던 ‘헬기 기총 사격’의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부터다.

1962년 금남로 1가 1번지 호남신문 사옥을 인수한 옛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는 그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의 사옥 신축에 나서 1968년 10월 준공했다.


◇1946년 전남신보·1947년 호남신문이 자리한 금남로 1가 1번지, 1952년 창간한 전남일보가 1962년 인수=전일빌딩은 금남로와 뗄 수 없는 관계이며, 1925년 금남로의 도로 지정, 1968년 확장 등의 과정과 함께 하고 있다. 금남로가 현재 구도심의 중심도로로 부상한 것은 1968년부터 시작된 확장공사 덕분이다. 그 전 금남로는 2차선 정도의 작은 길이었다. 금남로는 아마도 광주읍성 당시에는 전남도청 맞은편에 자리한 동헌(지방 수령이 정무를 보는 장소), 서헌(지방관아의 안채), 객사(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장소) 등 관공서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 금남로 1가 1번지에는 1946년 전남신보, 그 뒤 1947년 노산 이은상이 이끈 호남신문이 있었다. 이 호남신문이 1962년 8월 31일 지령 4783호로 폐간하면서, 광주일보의 창업주이자 당시 전남일보 사장인 남봉 김남중 선생이 1962년 12월 10일 인수하였다. 당시 2층 목조건물 본관 2층, 붉은 벽돌 건물인 1층 인쇄공장으로 구성된 이 건물이 전일빌딩의 첫 걸음이었다.

◇2층 건물 부지에 7층 신축, 10층으로 증축되며 1970년대까지 가장 높은 건물로=1962년 호남신문 건물을 인수한 남봉 김남중은 기존 건물과 인쇄공장의 그 터 위에 사옥인 전일회관(전일빌딩)을 1968년 10월 22일 준공하였다. 전일회관 준공은 1968년 8월부터 시작된 금남로 확장공사로 가능했다. 금남로 확장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 광주를 찾아 광주~송정 간 고속화도로 신설 등과 함께 지시한 현안 사업이었다. 전라남도의 예산에 지역유지들이 박 전 대통령에게 기부한 돈까지 더해져 금남로의 폭이 기존 12.7m에서 30m로 넓히는 공사가 1968년 8월 시작, 1969년 12월 준공됐다.

1992년 발간된 ‘광주일보 40년사’에 따르면, 1차 증축공사는 1974년 2월 22일 착공해 같은 해 9월 25일 준공됐으며, 이로 인해 대지는 780평(2,578.5㎡)로 확장되었다. 1975년 8월 15일 기존 7층을 10층으로 증축하는 공사가 시작돼 1980년 12월 31일 완공됐다.

1980년 11월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이 통합하면서 명칭을 광주일보로 새롭게 했으며, 광주일보는 1년 3개월 21일 동안 다른 곳에 있다가 1982년 3월 20일 전일회관 7~10층으로 이전해 다시 금남로 1가 1번지 시대를 열었다. 이후 세부적으로 9차례의 건물 증축을 통해 대지 840평(2,776.8㎡) 건축연면적 6,088평(2만125.6㎡) 지하 1층 지상 10층의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됐다.

1969년 금남로 확장 공사 직후의 금남로 모습. 전일빌딩은 증축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미디어 및 문화시설 집적, 1970~90년대 미디어문화복합시설, 80년부터 광주 현대사의 중심 장소로=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전일빌딩은 명실상부한 지역의 대표 건물로, 미디어와 문화연구시설이 한 자리에 입주해 있었다. 1960년대 말 주간 소년, 1970년 전일그라프, 1971년 4월 전일방송국이 각각 전일빌딩에 자리하기도 했다. 특히 전일방송국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정책으로 인해 1980년 12월 1일 개국 3,507일 만에 KBS 광주방송총국으로 통합됐다.

1971년 2월 전일미술연구소, 1974년 9월 전일미술관 등이 개설되는 등 당시 전일빌딩은 광주의 문화미디어 거점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했다. 1984년 월간 잡지인 예향이 발간되었으며, 3·1절 마라톤, 호남예술제 등 다양한 문화행사의 장소로도 쓰였다.

전일빌딩이 현대사의 중심 건물로 부상한 것은 금남로, 전남도청 앞 현재의 5·18 민주광장 등이 광주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소, 즉 시민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는 장이 되면서부터다. 금남로에는 1960년 4·19 당시 이승만 하야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모여 금남로는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로 가득 차기도 했다. 1979년 ‘10·26’으로 유신 독재가 몰락하자 사람들은 금남로에 모여 민주주의를 외쳤으나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오히려 계엄령을 확대하는 등 국민들을 탄압하였다. 전일빌딩은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와 금남로를 지키던 시민군이 계엄군의 진압과 총격을 피해 찾아들었던 ‘도피처’였고, 내외신 기자들이 군부독재의 날선 통제 속에서 시민의 항거와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 과정을 취재·보도했던 ‘격동의 현장’이었다.

◇전일빌딩 중심의 구도심 쇠락, 광주도시공사 매입,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 흔적 드러나며 역사의 현장으로=광주 현대사의 중심에 자리했던 전일빌딩이 쇠락한 구도심의 상징이 되면서 경매에 넘어간 것이 2011년의 일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지역신문업계가 쇠락하고, 2004년 전일빌딩의 터줏대감이었던 광주일보가 이전하면서 전일빌딩의 입주업체들이 급감했다. 7년 뒤인 2011년 7월 광주지법 입찰법정에서 실시된 전일빌딩 3차 경매에서 광주도시공사가 138억1165만5000원을 써 내 이 건물을 낙찰받았다.

광주시와 광주도시공사는 전일빌딩을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연계한 주차장, 문화편의시설 등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였지만, 2016년 12월 빌딩 내외부에서 20여 개의 탄흔이 발견되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 정치권, 시민사회의 높은 관심 속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의 면밀한 조사 끝에 전일빌딩 헬기 총탄흔이 M16 소총이나, M60기관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후 기관총 발사 장면을 봤다는 목격자들이 잇따랐다. 2017년 8월 광주시가 전일빌딩을 5·18 사적지 제28호로 11일 지정고시하면서 탄흔이 선명한 9~10층의 보존 필요성이 제기됐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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