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전에는 거북선, 육전엔 화차-임진왜란 국방과학자
2019년 01월 22일(화) 00:00 가가
<제1부> 의로운 땅 ② 수전에는 거북선, 육전엔 화차-임진왜란 국방과학자
특수전함 ‘거북선’ .기관총·탱크 ‘화차’. 세계 첫 비행기 ‘비거’ 전라도인의 창의성 조선을 구했다
특수전함 ‘거북선’ .기관총·탱크 ‘화차’. 세계 첫 비행기 ‘비거’ 전라도인의 창의성 조선을 구했다
左右勝敗 在精兵器 (전쟁승패 좌우함은 정밀병기 있음이라)
水則龜船 陸則火車 (수전에는 거북선과 육전에는 화차로다)
경기도 고양시 행주서원의 ‘망암 변이중 선생 봉안문’ 일부다.
임진왜란은 조선 최대 위기였다. 국난에 처할수록 이를 극복하고자 민중은 뭉쳤고, 창의력은 샘이 솟았다. 조선인의 독창성이 가장 많이 발휘된 때가 바로 임진왜란이다. 특수전함 ‘거북선(龜船)’, 기관총·탱크의 원조 ‘화차(火車)’, 세계 최초 비행기 ‘비거(飛車)’, 시한폭탄의 효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우수한 국방과학자 대부분은 전라도인이었다. 거북선은 나주 나대용이, 화차는 장성 변이중이, 비거는 김제 정평구 선생이 창안·제작해 실전에 투입됐다. 이들의 위업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육군포병학교 예하 부대는 ‘변이중대대’이고, 해군의 8번째 잠수함은 ‘나대용함’이며, 공군사관학교에는 ‘비거’가 전시돼 이들을 기리고 있다.
◇특수전함·쾌속정 설계, 나주 나대용
‘체암공이 없었던들 충무공이 그 같은 큰 공을 세울 수 없었으며, 나 장군은 충무공이 없었던들 그 포부를 실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이 조정에 낸 장계의 일부다. 이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나대용 장군의 공이 충무공 못지않게 컸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나대용 장군의 가장 큰 공훈은 새로운 병기 ‘거북선’ 건조였다.
1556년(명종 11년) 나주시 문평면 오륜리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다. 그가 거북선 제작에 뜻을 둔 것은 17~18세였다. 영산강에 출몰하는 왜구의 끊임없는 행패를 보다못해 왜선보다 더 훌륭한 거북선을 만들어 왜구를 무찌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28세에 무과에 급제,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다 8년 뒤 낙향했다.
그가 거처하던 초당의 방벽에는 거북선 설계도로 덮였고, 낮에는 산에 올라가 재목을 베어오고, 밤에는 거북선 모형을 만들었다. 10년의 각고 끝에 1591년 마을 앞 방죽에서 거북선 진수 시험을 했다.
시험에 성공한 그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오자 여수로 찾아갔고, 충무공은 그에게 거북선 제작을 맡겼다. 1592년 2월, 3척의 거북선이 마침내 진수됐다.
이 거북선은 왜적의 특기전술인 육박접전을 막기 위해 덮개 대신 칼송곳을 꽂아 적이 발붙이지 못하게 했다. 그 후 다시 개량돼 적의 화공에 대비해 철판이 씌어졌다. 나 장군은 이후 거북선을 개량한 창선, 쾌속정인 해추선도 발명했다.
거북선은 1592년 5월29일 당포 앞바다 사천전투에 처음 출정해 크게 승전하는 등 충무공의 23전 23승 무패 신화의 주역이 됐다.
거북선의 우수성은 현대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지난 2016년 미국 해군연구소(USNI)가 선정한 ‘세계 7대 군함’에 이름을 올렸다.
USNI는 거북선의 곡선형 갑판과 크기 등을 언급하며 “거의 2세기를 앞서 만들어진 최고의 형태”라고 극찬했다. 또 “거북선의 입에서 나오는 연기는 강력한 심리적 무기”라며 “사실상 침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속도도 빠르고 조종도 쉽다”고 평했다.
해군은 그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0년 건조한 8번째 잠수함(1400t, 승조원 40여명)을 ‘나대용함’이라 명명했다. 나대용함 승조원들은 나주시와 2001년 자매결연을 맺고, 매년 과학의 날(4월21일) 소충사에서 열리는 추모제에 참석하고 있다.
나주시 문평면 생가와 묘소, 방죽골, 장군바위 등 나대용 장군 유적이 전라남도 문화재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돼 있으며, 장군의 영정·위패가 봉안된 소충사(昭忠祠)가 방죽골 뒤에 자리하고 있다. 오는 4월에는 나대용 장군 학술세미나가 열린다.
◇기관총·탱크의 원조 ‘화차’ 창제, 장성 변이중
“호남소모사 변이중은 화차를 창제하여 위공(偉功)을 거두니, 곧 커다랗게 전차를 만들고 1거(車)에 혈(穴) 40을 뚫어 혈마다 승자총을 걸고 연심(連心)으로써 발화하여 계속 발화케 한 것으로서, 성위(聲威)와 추격력(推擊力)이 비길 데 없었다. 화차도 예부터 있어 화전 발사에 썼지만, 변이중은 그것을 창조적으로 진보시킨 것이니, 말하자면 기관포 또는 탱크의 조(祖)라 할 것이다.” <최남선 저서 ‘고사통(古事通)’에서>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윤재도 ‘화차를 기관총과 탱크의 원조’라고 의미 부여했다. 그러면서 화차가 조선의 가장 독창적인 발명품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자 보배라고 강조했다.
정조는 그의 문집 ‘홍재전서’에서 “임진왜란때 소모사 변이중이 처음으로 화차를 만들어 한 차에 총구 40개를 뚫어 연속발사되게 하였다. 순찰사 권율의 행주대첩은 이 화차에 힘입은 바 크다”고 극찬했다.
수군에 거북선이 있었다면 육군에는 비밀병기 ‘화차(火車)’가 있었다. 임진왜란 승리의 비결이다.
‘변이중 화차’는 전면에 14개, 좌·우 측면에 각각 13개 등 총 40개의 승자총통을 장착했다. 승자총통은 심지에 불을 붙여 총알을 발사하는 직사화기로, 1기당 최대 15발의 탄환을 발사했다. 따라서 한꺼번에 전방으로 210발, 좌·우 방향으로 각각 195발씩 총 600발을 연속발사했다. 일종의 기관총이었다.
이 화차의 특징은 화살이 아닌 탄환을 쏠 수 있게 개량했고, 앞으로만 쏘던 장치를 옆으로도 발사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화차 둘레에 방호벽을 설치해 군사들을 보호하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 탱크의 원조인 셈이다.
화차는 지난 2011년 420년만에 복원돼 장성 육군포병학교 훈련장에서 재현됐다. 시연회에서 화차는 정면에 장착된 14개의 승자총통을 2번 발사, 300m 전방의 목표물을 정확히 명중시켰다. 특히 두꺼운 판자를 가볍게 뚫는 강력한 화력을 뽐냈다.
화차를 만든 이는 망암 변이중 선생이다. 선생은 1546년 장성읍 장안리에서 태어나 23세때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 생원이 됐고, 2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사헌부 감창, 공조좌랑, 성균관 전적, 황해도 도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선조의 특명으로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군량미와 의병 모집하는 관리)로 활약했다. 또 기존 화차를 개량, 자비로 화차 300량과 총통을 제작해 전라감사 권율이 적과 대치하던 행주산성으로 40량을 보내 행주대첩의 승리를 안겼다.
그의 고향 장성에는 선생의 학문과 우국충절의 정신을 기리는 봉암서원이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 제사를 지낸다.
◇세계 최초 비행기 발명, 김제 정평구
조선시대에도 비행기가 있었다. 하늘을 나는 수레 ‘비거(飛車)’다.
비거는 전북 김제 출신 군관 정평구가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때 만들어 사용했다고 전한다. 이 때가 1592년이니, 미국 라이트 형제가 플라이어호로 첫 비행에 성공한 때(1903)보다 300년 이상 앞선다. 세계 최초 비행기인 셈이다.
비거에 대한 최초 기록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규경의 백과전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 “4인승으로 규모가 컸으며, 생김새는 따오기 모습과 비슷하며,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두드리면 바람이 일어 공중에 떠올라 능히 백장(百丈)을 날 수 있다”고 쓰여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은 ‘여암전서(旅菴全書)’에서 “진주성이 왜군에게 포위되자, 정평구는 평소의 재간을 이용하여 만든 비거를 타고 포위당한 성 안에 날아 들어가 30리 성 밖까지 친지를 태우고 피난시켰다고 한다”라고 기록했다.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측 기록인 ‘왜사기(倭史記)’에는 “전라도 김제에 사는 정평구가 비거를 발명하여 1592년 10월 진주성전투에서 이를 사용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공군사관학교는 지난 2000년 12월 비거를 복원했다. 대략 6개월에 걸쳐 임진왜란 당시 사용 가능했던 대나무와 무명천, 마끈, 화선지 등을 이용해 비차를 복원한 것이다. 이 비거는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전시돼 있다.
비거 발명가 정평구 선생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북 김제 출신 무관으로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 장군 휘하에서 화약을 다루는 임무를 맡았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의 신식무기 조총 앞에 조선의 창과 화살은 무력했고, 이에 그가 오늘날 비행기와 같은 비거를 만들게 되었다. 비거는 진주성 전투에서 외부와 연락을 하고, 진주성으로 식량을 나르고, 종이폭탄을 발명해 전투에 사용했다고 한다.
정평구 선생과 비거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최남선은 그를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으로 선정했다.
/글·사진=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水則龜船 陸則火車 (수전에는 거북선과 육전에는 화차로다)
경기도 고양시 행주서원의 ‘망암 변이중 선생 봉안문’ 일부다.
임진왜란은 조선 최대 위기였다. 국난에 처할수록 이를 극복하고자 민중은 뭉쳤고, 창의력은 샘이 솟았다. 조선인의 독창성이 가장 많이 발휘된 때가 바로 임진왜란이다. 특수전함 ‘거북선(龜船)’, 기관총·탱크의 원조 ‘화차(火車)’, 세계 최초 비행기 ‘비거(飛車)’, 시한폭탄의 효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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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용 장군 영정. |
◇특수전함·쾌속정 설계, 나주 나대용
‘체암공이 없었던들 충무공이 그 같은 큰 공을 세울 수 없었으며, 나 장군은 충무공이 없었던들 그 포부를 실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이 조정에 낸 장계의 일부다. 이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나대용 장군의 공이 충무공 못지않게 컸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1556년(명종 11년) 나주시 문평면 오륜리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다. 그가 거북선 제작에 뜻을 둔 것은 17~18세였다. 영산강에 출몰하는 왜구의 끊임없는 행패를 보다못해 왜선보다 더 훌륭한 거북선을 만들어 왜구를 무찌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28세에 무과에 급제,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다 8년 뒤 낙향했다.
그가 거처하던 초당의 방벽에는 거북선 설계도로 덮였고, 낮에는 산에 올라가 재목을 베어오고, 밤에는 거북선 모형을 만들었다. 10년의 각고 끝에 1591년 마을 앞 방죽에서 거북선 진수 시험을 했다.
시험에 성공한 그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오자 여수로 찾아갔고, 충무공은 그에게 거북선 제작을 맡겼다. 1592년 2월, 3척의 거북선이 마침내 진수됐다.
이 거북선은 왜적의 특기전술인 육박접전을 막기 위해 덮개 대신 칼송곳을 꽂아 적이 발붙이지 못하게 했다. 그 후 다시 개량돼 적의 화공에 대비해 철판이 씌어졌다. 나 장군은 이후 거북선을 개량한 창선, 쾌속정인 해추선도 발명했다.
거북선은 1592년 5월29일 당포 앞바다 사천전투에 처음 출정해 크게 승전하는 등 충무공의 23전 23승 무패 신화의 주역이 됐다.
거북선의 우수성은 현대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지난 2016년 미국 해군연구소(USNI)가 선정한 ‘세계 7대 군함’에 이름을 올렸다.
USNI는 거북선의 곡선형 갑판과 크기 등을 언급하며 “거의 2세기를 앞서 만들어진 최고의 형태”라고 극찬했다. 또 “거북선의 입에서 나오는 연기는 강력한 심리적 무기”라며 “사실상 침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속도도 빠르고 조종도 쉽다”고 평했다.
해군은 그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0년 건조한 8번째 잠수함(1400t, 승조원 40여명)을 ‘나대용함’이라 명명했다. 나대용함 승조원들은 나주시와 2001년 자매결연을 맺고, 매년 과학의 날(4월21일) 소충사에서 열리는 추모제에 참석하고 있다.
나주시 문평면 생가와 묘소, 방죽골, 장군바위 등 나대용 장군 유적이 전라남도 문화재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돼 있으며, 장군의 영정·위패가 봉안된 소충사(昭忠祠)가 방죽골 뒤에 자리하고 있다. 오는 4월에는 나대용 장군 학술세미나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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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암 변이중 화차 복원사업회의 화차 복원 발사 시연. <광주일보 자료사진> |
◇기관총·탱크의 원조 ‘화차’ 창제, 장성 변이중
“호남소모사 변이중은 화차를 창제하여 위공(偉功)을 거두니, 곧 커다랗게 전차를 만들고 1거(車)에 혈(穴) 40을 뚫어 혈마다 승자총을 걸고 연심(連心)으로써 발화하여 계속 발화케 한 것으로서, 성위(聲威)와 추격력(推擊力)이 비길 데 없었다. 화차도 예부터 있어 화전 발사에 썼지만, 변이중은 그것을 창조적으로 진보시킨 것이니, 말하자면 기관포 또는 탱크의 조(祖)라 할 것이다.” <최남선 저서 ‘고사통(古事通)’에서>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윤재도 ‘화차를 기관총과 탱크의 원조’라고 의미 부여했다. 그러면서 화차가 조선의 가장 독창적인 발명품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자 보배라고 강조했다.
정조는 그의 문집 ‘홍재전서’에서 “임진왜란때 소모사 변이중이 처음으로 화차를 만들어 한 차에 총구 40개를 뚫어 연속발사되게 하였다. 순찰사 권율의 행주대첩은 이 화차에 힘입은 바 크다”고 극찬했다.
수군에 거북선이 있었다면 육군에는 비밀병기 ‘화차(火車)’가 있었다. 임진왜란 승리의 비결이다.
‘변이중 화차’는 전면에 14개, 좌·우 측면에 각각 13개 등 총 40개의 승자총통을 장착했다. 승자총통은 심지에 불을 붙여 총알을 발사하는 직사화기로, 1기당 최대 15발의 탄환을 발사했다. 따라서 한꺼번에 전방으로 210발, 좌·우 방향으로 각각 195발씩 총 600발을 연속발사했다. 일종의 기관총이었다.
이 화차의 특징은 화살이 아닌 탄환을 쏠 수 있게 개량했고, 앞으로만 쏘던 장치를 옆으로도 발사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화차 둘레에 방호벽을 설치해 군사들을 보호하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 탱크의 원조인 셈이다.
화차는 지난 2011년 420년만에 복원돼 장성 육군포병학교 훈련장에서 재현됐다. 시연회에서 화차는 정면에 장착된 14개의 승자총통을 2번 발사, 300m 전방의 목표물을 정확히 명중시켰다. 특히 두꺼운 판자를 가볍게 뚫는 강력한 화력을 뽐냈다.
화차를 만든 이는 망암 변이중 선생이다. 선생은 1546년 장성읍 장안리에서 태어나 23세때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 생원이 됐고, 2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사헌부 감창, 공조좌랑, 성균관 전적, 황해도 도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선조의 특명으로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군량미와 의병 모집하는 관리)로 활약했다. 또 기존 화차를 개량, 자비로 화차 300량과 총통을 제작해 전라감사 권율이 적과 대치하던 행주산성으로 40량을 보내 행주대첩의 승리를 안겼다.
그의 고향 장성에는 선생의 학문과 우국충절의 정신을 기리는 봉암서원이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 제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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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암 변이중 화차 복원사업회의 화차 복원 발사 시연. <광주일보 자료사진> |
◇세계 최초 비행기 발명, 김제 정평구
조선시대에도 비행기가 있었다. 하늘을 나는 수레 ‘비거(飛車)’다.
비거는 전북 김제 출신 군관 정평구가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때 만들어 사용했다고 전한다. 이 때가 1592년이니, 미국 라이트 형제가 플라이어호로 첫 비행에 성공한 때(1903)보다 300년 이상 앞선다. 세계 최초 비행기인 셈이다.
비거에 대한 최초 기록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규경의 백과전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 “4인승으로 규모가 컸으며, 생김새는 따오기 모습과 비슷하며,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두드리면 바람이 일어 공중에 떠올라 능히 백장(百丈)을 날 수 있다”고 쓰여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은 ‘여암전서(旅菴全書)’에서 “진주성이 왜군에게 포위되자, 정평구는 평소의 재간을 이용하여 만든 비거를 타고 포위당한 성 안에 날아 들어가 30리 성 밖까지 친지를 태우고 피난시켰다고 한다”라고 기록했다.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측 기록인 ‘왜사기(倭史記)’에는 “전라도 김제에 사는 정평구가 비거를 발명하여 1592년 10월 진주성전투에서 이를 사용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공군사관학교는 지난 2000년 12월 비거를 복원했다. 대략 6개월에 걸쳐 임진왜란 당시 사용 가능했던 대나무와 무명천, 마끈, 화선지 등을 이용해 비차를 복원한 것이다. 이 비거는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전시돼 있다.
비거 발명가 정평구 선생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북 김제 출신 무관으로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 장군 휘하에서 화약을 다루는 임무를 맡았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의 신식무기 조총 앞에 조선의 창과 화살은 무력했고, 이에 그가 오늘날 비행기와 같은 비거를 만들게 되었다. 비거는 진주성 전투에서 외부와 연락을 하고, 진주성으로 식량을 나르고, 종이폭탄을 발명해 전투에 사용했다고 한다.
정평구 선생과 비거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최남선은 그를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으로 선정했다.
/글·사진=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