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 생각’] 귀로 향기를 들어야 하는 꽃
2019년 01월 17일(목) 00:00 가가
한 해의 가장 추운 때라는 대한(大寒)을 며칠 앞둔 숲에 매화꽃이 피었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은 여전히 차갑지만, 꽃망울엔 이미 봄의 기미가 가득 들었다. 무성한 가지 위에 고작 몇 송이뿐이지만, 새해 들어 처음 만나는 꽃이어서 더없이 반가웠다. 예부터 ‘설중매’(雪中梅)라 하여 매화는 눈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했으니, 매화로서는 이른 것도 아니다. 언제나 이 땅의 봄을 가장 먼저 불러오는 건 매화다. 이런 까닭에 매화꽃 개화를 기다리는 마음은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활짝 펼치려는 생명의 본능에 가깝지 않나 싶다.
매화나무라 했지만, 우리 식물도감에 매화나무라는 나무는 없다. 식물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 대개는 열매 이름을 중심으로 붙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밤이 열리는 나무는 밤나무, 감이 열리는 나무는 감나무로 부르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매화 꽃진 자리에 맺히는 열매가 매실이기에 식물학에서 부르는 이름은 ‘매실나무’다. 하지만 우리의 옛 선비들이 이 나무를 좋아했던 이유는 열매 때문이 아니요 은은한 향을 홀로 아득히 풍기는 꽃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매화나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매화나무는 처음에 중국에서 들어왔지만, 기원전부터 우리 땅에 들어와 우리 선비들에게 사랑받은 나무다. 그러니 우리 나무라 해도 문제 될 게 없다. 옛 선비들은 매화를 유난스레 좋아했다. 옛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매화만큼 자주 등장하는 꽃도 없다.
옛사람들이 매화를 고르는 데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젊은 것보다 늙은 것을, 살진 것보다 마른 것을, 번거로운 것보다 희귀한 것을 더 귀하게 여겼다. 풍성하게 피어나는 여느 꽃을 즐긴 것과 달리 매화만큼은 홀로 선 늙은 나무에서 한두 송이씩 성글게 피어나는 걸 즐겼다는 이야기다. 이유가 있다. 세상의 풍진을 벗어나 은둔하는 선비의 이미지를 매화에서 찾은 것이다.
매화를 즐기는 법도 따로 있었다. ‘문향’(聞香)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향기를 듣는다’라는 뜻이다. 코로 맡는 게 당연한 향기를 귀로 들어야 한다고 표현했다. 문향이라 할 때의 ‘문’(聞)은 처음에는 듣는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이지만, 나중에 ‘이치를 깨우친다’ ‘알린다’ 는 등의 뜻이 더해졌고, ‘냄새를 맡는다’는 뜻까지 포함됐다. 그럼에도 소리를 듣는 기관인 귀를 뜻하는 ‘이’(耳)가 들어 있는 글자여서 아무래도 ‘듣는다’는 뜻이 가장 앞자리에 선다.
매화가 아닌 다른 꽃의 향기를 맡는다는 표현으로 ‘문향’을 쓴 경우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매화 향을 표현할 때만큼 자연스럽지는 않다. 매화꽃 감상법을 유독 문향이라 한 것은 매화를 사랑한 이유에 닿아 있다. 매화는 번거로운 시정(市井)이 아니라, 고요한 은사의 정원이라든가 산사의 뜨락에서 홀로 아득히 풍겨오는 향기를 감상하는 게 맞춤하다는 생각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매화 애호가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사람으로 가난한 화가 김홍도가 있었다. 그는 그림을 판 돈 삼천 냥 가운데 이천 냥으로 매화 한 그루를 사고, 팔백 냥으로는 동무들을 불러 매화꽃 아래서 술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매화음(梅花飮)이라는 고사의 연유다. 홀로 은근히 즐기기보다는 벗들과 함께 즐겨야 한다는, 문향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감상법이다.
나무마다 가까이 다가서는 법이 제가끔 다른 건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그렇듯 나무에도 저마다의 특징이 따로 있기에 그 특징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다가서는 법이 달라야 한다. 하지만 생명을 만나는 데에 특별한 규칙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한 생명에 다가서려는 지극한 관심과 성의다.
곧 이 땅에 봄이 다가올 것이고 매화는 온 땅에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향기를 가득 채울 것이다.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새봄을 더 찬란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꽃 한 송이에 대한 관심과 성의가 필요하다. 아직은 우리 곁의 생명들이 매운바람 맞으며 애면글면 살아가는 겨울이다. 그러나 이제 곧 봄이 온다. 모든 생명을 더 소중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계절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매화를 즐기는 법도 따로 있었다. ‘문향’(聞香)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향기를 듣는다’라는 뜻이다. 코로 맡는 게 당연한 향기를 귀로 들어야 한다고 표현했다. 문향이라 할 때의 ‘문’(聞)은 처음에는 듣는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이지만, 나중에 ‘이치를 깨우친다’ ‘알린다’ 는 등의 뜻이 더해졌고, ‘냄새를 맡는다’는 뜻까지 포함됐다. 그럼에도 소리를 듣는 기관인 귀를 뜻하는 ‘이’(耳)가 들어 있는 글자여서 아무래도 ‘듣는다’는 뜻이 가장 앞자리에 선다.
매화가 아닌 다른 꽃의 향기를 맡는다는 표현으로 ‘문향’을 쓴 경우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매화 향을 표현할 때만큼 자연스럽지는 않다. 매화꽃 감상법을 유독 문향이라 한 것은 매화를 사랑한 이유에 닿아 있다. 매화는 번거로운 시정(市井)이 아니라, 고요한 은사의 정원이라든가 산사의 뜨락에서 홀로 아득히 풍겨오는 향기를 감상하는 게 맞춤하다는 생각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매화 애호가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사람으로 가난한 화가 김홍도가 있었다. 그는 그림을 판 돈 삼천 냥 가운데 이천 냥으로 매화 한 그루를 사고, 팔백 냥으로는 동무들을 불러 매화꽃 아래서 술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매화음(梅花飮)이라는 고사의 연유다. 홀로 은근히 즐기기보다는 벗들과 함께 즐겨야 한다는, 문향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감상법이다.
나무마다 가까이 다가서는 법이 제가끔 다른 건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그렇듯 나무에도 저마다의 특징이 따로 있기에 그 특징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다가서는 법이 달라야 한다. 하지만 생명을 만나는 데에 특별한 규칙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한 생명에 다가서려는 지극한 관심과 성의다.
곧 이 땅에 봄이 다가올 것이고 매화는 온 땅에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향기를 가득 채울 것이다.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새봄을 더 찬란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꽃 한 송이에 대한 관심과 성의가 필요하다. 아직은 우리 곁의 생명들이 매운바람 맞으며 애면글면 살아가는 겨울이다. 그러나 이제 곧 봄이 온다. 모든 생명을 더 소중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계절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