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충정·의기의 호남 의병, 진주성 출병을 결의하다
2019년 01월 08일(화) 00:00
<제1부> 의로운 땅 ①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이다-호남 의병 4人
나주 김천일·화순 최경회, 진주성서 10만 왜군에 맞서
담양 고경명, 선조 파천에 창의거병…금산 전투서 순절
‘전국 의병 총사령관’ 광주 김덕령, 영남 서부 등서 활약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왜군과 격전을 벌인 2차례의 진주성 전투.

1592년 10월,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은 호남 의병장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일부 의병장은 “지금 적세가 사방에 뻗쳐는데 어찌 호남을 버리고 멀리있는 영남을 구원하겠는가”라며 반대한다. 그러나 최경회는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이거늘, 어찌 멀고 가까움을 가리겠는가”라며 영남 출병을 결정한다.

호남 의병의 충정과 의기가 잘 드러나는 결단이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전라도가 보존됐기 때문이다. 이는 전라도 의병과 수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의병의 저항은 왜군에게 전략상 큰 타격을 줬다. 의병은 직접 전투에 참여해 승리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의 사기를 높여 전투에 참여하게 하고, 유격전술로 왜군이 전투에 전념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데 의의가 크다.

의병활동의 원동력은 많은 병력이나 우수한 무기보다는 충성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력이었다. 이러한 정신력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요인이었고, 전라도는 최대 의병 봉기지였다.

고경명이 나이 60세에 창의거병하여 출전하던 중 말 위에서 각 도의 관원·군인·백성들에게 구국일념을 일깨우기 위해 작성해 보낸 ‘마상격문’.


◇‘호남 최초 의병장’ 나주 김천일

호남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나주 출신 건재 김천일(1537~1593) 선생이다. 선생은 학덕이 뛰어나 호남 5현으로 꼽혔으며, 선정을 베푼 관리로도 유명하다. 56세에 은퇴 후 고향에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했다.

왜군의 주력이 2차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자 조정은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해 수성을 포기하라는 명을 내렸고, 도원수 권율과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는 진주를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김천일은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진주는 호남의 보장(保障·막아 보호해주는 곳)이다. 호남은 진주에 매우 가까우니, 진주가 없으면 호남이 없다. 성을 비우고 적을 피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함은 계책이 아니다”라며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진주성으로 입성했다. 그러자 관군과 최경회·고종후·황진 등 호남 의병장들이 의병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10만명에 가까운 왜적을 9일간 막아냈지만 중과부적으로 끝내 성이 함락됐다. 장군은 맏아들 상건과 촉석루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그의 위패는 나주 정렬사와 진주 창렬사에 모셔져 있다. 정렬사에는 갑옷도 투구도 없이 칼을 쥔 동상이 서 있다. 그 아래에는 “56세의 선비로 붓을 버리고 쾌자만을 걸치고 투구없는 맨머리로 앞장서니 선생의 충국에 큰 뜻을 따르는 의사가 많았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김천일


◇‘호남도 영남도 우리땅’ 화순 최경회

화순 출신 의병장 충의공 최경회(1532~1593) 선생은 호남 최초 의병장 김천일과 함께 생을 마쳤다. 제2차 진주성 전투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어머니 상중임에도 상복차림으로 의병을 모아 일어났다. 남원·장수·무주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경상도로 진군해 진주성 전투에서 9일 밤낮을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함께 싸우던 조카 홍재에게 언월도를 건네준 뒤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김천일·고종후 등과 죽음을 맹세하는 서사시(誓死詩)를 남기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촉석루 가운데 세 장수 / 한 잔 술로 웃으며 장강물 가리키네 / 장강의 물도 도도히 흘르나니 / 저 물결 마르지 않으니 우리의 영혼도 죽지 않으리.”

그의 나이 예순둘이었다. 세 장수는 김천일과 고경명의 장남인 의병장 고종후, 그리고 자신을 가리킨다.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했지만 심한 손실을 입어 전라도 진출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라도 의병들이 몸을 던져 그들을 막아 낸 것이다.

그의 둘째부인은 선생보다 더 유명하다. 충절의 사표 논개 부인이다. 화순군 동면 백용리 충의사에는 최경회 선생 사당을 비롯해 논개의 영정을 모신 의암영각과 기념관, 동상, 어록비 등이 있다. 그의 위패는 진주 창렬사, 능주 포충사, 화순 삼충각에 배향됐다.

최경회


◇‘말 위에서 격문을 짓다’ 담양 고경명

“아! 우리 열읍 수령, 각 처 사민(士民)들아!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빌려 주고, 혹은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전장에서 앞장서고,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나리라. 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오직 의로 돌아가서 능히 임금을 위해 난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행동하기를 원한다.”

1592년 6월24일. 나이 60세에 창의거병하여 출전하던 중 말 위에서 각 도의 관원·군인·백성들에게 구국일념을 일깨우기 위해 쓴 제봉 고경명 선생의 ‘마상격문’이다. 말 위에서 격문을 작성하느라 어지러운 필체로 쓰여져 당시 다급했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비유와 대구로 쓰여진 격문은 비장함과 호소력에서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이나 제갈량의 ‘출사표’에 비견된다고 할 정도로 명문이다.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치열했던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그는 문과 갑과에 장원급제한 관리였으며, 빼어난 시문으로 명나라에까지 이름이 났던 문인이었다.

그는 왜적의 침략으로 선조가 의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에 분연히 일어섰다. 육순 노인에 건강도 온전치 않았지만 격문을 돌려 의병 6000명을 모았다. 고경명 의병은 임금을 구하고자 북상하다가 금산에서 왜군과 맞붙는다.

그러나 관군이 무너지자 고경명 의병도 무너졌다. 그도 차남 인후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거병한 지 한 달 여 만이었다. 장남 종후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간신히 수습한 뒤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전투에서 김천일·최경회와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비록 패했지만 의병들의 피어린 분투로 왜적의 기세는 한풀 꺾였고, 곡창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광주시 남구에는 포충사가 있다. 고경명과 두 아들인 종후·인후, 부장이었던 유팽로·안영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고경명


◇‘나라 구하고도 역적 누명’ 광주 김덕령

60평생을 붓만 잡았던 제봉 고경명이 의병장이 되었고, 혈기와 지혜를 갖춘 26살의 김덕령도 의병장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 부대에 들어갔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한다.

이듬해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선조는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의 군호를, 전주에서 분조를 이끌던 세자 광해군은 익호장군의 군호를 내린다.

이 때부터 김덕령은 전국 의병 총사령관이 되어 크게 이름을 떨친다. 권율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지역 방어 임무를 맡았고, 1594년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큰 공을 세운다.

전쟁이 끝날 무렵 조선 의병의 총수였던 김덕령을 이몽학과 모반을 획책했다며 압송한다.

김덕령


그리고 모진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한다. 하지만 내통할리 없었던 김덕령은 묵묵히 형벌을 감내하고 마침내 매를 맞아 죽게 된다.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해낸 의병들의 구심 김덕령은 이렇게 역적이 되었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 그는 감옥에서 시조 한 수를 남겼다. ‘춘산곡(春山曲)’이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 이 몸의 내 없는 불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왜적의 핍박아래 놓인 국가를 구하고자 분연히 칼을 잡았던 장군, 답답한 심정을 온몸으로 절규하며 꽃과 불로 표현한 절명시다.

김덕령은 체구는 작지만 날래고 민첩해 호남일대의 모든 씨름판의 끝판왕이 되는 등 숱한 무용담을 남겼다. 무술연마와 학문수양의 보금자리였던 무등산 곳곳에는 주검동이나 뜀바위처럼 그의 발자취가 서려있다. 충장사는 호남 최대 번화가인 광주 충장로와 함께 장군의 드높은 절의정신을 오롯이 기억하게 해주는 장소다.

/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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