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 사람의 마음
2019년 01월 07일(월) 00:00 가가
새벽을 달려 남도의 바닷가로 ‘해마중’을 갔다. 꽁꽁 얼어 있는 어둠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우뚝 솟아오른 해는 믿음직한 언약 같았다. 아픔과 차별과 눈물을 거두고 온 세상에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빌었다.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1973년 6월 3일 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토지’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토지’ 1부를 쓰던 삼 년 동안의 심경을 밝히는 글이었다.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그것을 응시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니…. 새해 첫 마음의 자리에 떠오른 문장이 이러했다.
들려오는 소식들이 처절하다. 비정규직, 꽃다운 청년의 죽음, 위험의 외주화, 노동의 파편화, 소외되는 사람들, 죽음을 무릅쓴 일터, 우리들의 노동 조건…. 더 이상 죽지 않게 해 달라는 눈물의 호소가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청년 노동자의 죽음을 두고 구조적 혁신과 진짜 짚어야 할 것들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모두는 이 깊은 슬픔과 분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길을 잃었는지 막막하고 무기력해지는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답하는 책들을 읽는다. 존재가 희망이 되는 책들이 가까이 있어서 그나마 숨통이 열린다. 2018년 많은 이들이 ‘올해 최고의 소설’로 꼽은 김탁환 작가의 ‘살아야겠다’가 그랬다. 소설은 2015년 여름의 메르스 사태를 환자와 가족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메르스 피해자의 고통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 아니,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가? 마지막 남은 한 명의 메르스 환자로 분류된 김석주가 고립감에 홀로 우는 밤, 그 한 사람의 마음을 그려 본 적이 있는가?”
마지막 질문 앞에서 무너지듯 눈물이 났다. 그 한 사람의 마음이라니…. 고열보다도, 구토보다도, 지구에 홀로 남은 듯한 고독이 가장 두려웠다고 말하지 않는가. 소설이 아니라면 세상과 격리된 채 바이러스 덩어리로 취급되었던 한 사내의 울음을 우리는 외면하고 말았을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삶과 죽음을 재수나 운(運)에 맡겨선 안 된다. 그 전염병에 안 걸렸기 때문에, 그 배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행운’은 얼마나 허약하고 어리석은가.”
우리가 분명 함께 건너온 시간인데 결코 함께 겪어 온 일이 아닌 것들이 되어 버리는 현실들은 암담하다. 그럼에도 살아야겠다고, 함께 살아야겠다고 소설은 외친다. 그렇다면 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만히 있지 말고 질문하라고. 그럼 내가 바뀌고, 그럼 세상도 바뀌기 시작한다고…. 원인의 원인을 찾아 더디지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가의 존재는 미더웠다. 따뜻하고 고마웠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혐오, 차별, 고용 불안, 재난 같은 사회적 상처가 어떻게 우리 몸을 병들게 하는지를 밝히는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쓴 김승섭 교수의 말은 울림이 깊다. 재난은 기록되어야 하고 고통의 원인을 함께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다.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각자도생의 사회, 운에 맡겨지는 삶에서 우리가 안녕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기록되지 않은 재난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엄기호 작가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와 정혜신 작가의 ‘당신이 옳다’ 역시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자 희망의 목소리다. 개인이 맞닥뜨린 위기에 함께 대응해 주고, 타인의 슬픔에 깊게 공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안전할 수 있고 서로에게 연결됨으로써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마음을 포개 주는 일은 조용히 ‘그 한 사람의 마음’을 그려 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마지막 질문 앞에서 무너지듯 눈물이 났다. 그 한 사람의 마음이라니…. 고열보다도, 구토보다도, 지구에 홀로 남은 듯한 고독이 가장 두려웠다고 말하지 않는가. 소설이 아니라면 세상과 격리된 채 바이러스 덩어리로 취급되었던 한 사내의 울음을 우리는 외면하고 말았을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삶과 죽음을 재수나 운(運)에 맡겨선 안 된다. 그 전염병에 안 걸렸기 때문에, 그 배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행운’은 얼마나 허약하고 어리석은가.”
우리가 분명 함께 건너온 시간인데 결코 함께 겪어 온 일이 아닌 것들이 되어 버리는 현실들은 암담하다. 그럼에도 살아야겠다고, 함께 살아야겠다고 소설은 외친다. 그렇다면 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만히 있지 말고 질문하라고. 그럼 내가 바뀌고, 그럼 세상도 바뀌기 시작한다고…. 원인의 원인을 찾아 더디지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가의 존재는 미더웠다. 따뜻하고 고마웠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혐오, 차별, 고용 불안, 재난 같은 사회적 상처가 어떻게 우리 몸을 병들게 하는지를 밝히는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쓴 김승섭 교수의 말은 울림이 깊다. 재난은 기록되어야 하고 고통의 원인을 함께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다.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각자도생의 사회, 운에 맡겨지는 삶에서 우리가 안녕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기록되지 않은 재난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엄기호 작가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와 정혜신 작가의 ‘당신이 옳다’ 역시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자 희망의 목소리다. 개인이 맞닥뜨린 위기에 함께 대응해 주고, 타인의 슬픔에 깊게 공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안전할 수 있고 서로에게 연결됨으로써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마음을 포개 주는 일은 조용히 ‘그 한 사람의 마음’을 그려 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