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 고려대 명예교수] 선거 제도와 ‘갑질’ 정치
2018년 12월 18일(화) 00:00
간디는 자신의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일종의 비폭력 투쟁)가 ‘수동적 저항’ 정도로 해석되는 것을 무척 못마땅해 했다. 본래 ‘진리에 굳게 섬’이라는 의미의 이 산스크리트 조어는 무조건적인 평화주의가 아닌, 전쟁 수행의 적극적 방법이었다. 제이 차 세계 대전 직후 영국의 노동당 정부가 전격 단행했던 인도의 독립에 간디의 비폭력 투쟁이 과연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옳건 그르건, 적어도 그는 생각과 말에서 일관되게 정직했고, 행동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는 게 중론이다. 그리하여 사람을 평하는 데 박하기로 유명한 조지 오웰은, 간디를 다룬 한 서평에서, “성자로 불리는 이들은 죄 없다고 증명될 때까지 늘 죄 있는 자로 간주돼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간디를 청정한 향기를 길이 남긴 정치인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간디는 ‘유죄 추정’이라는 오웰의 혹독한 기준을 통과한 셈인데, 인간 사회에는 유죄 판결이 나기 전에도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야 하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늘 있어 왔다. 사회 경제적 강자들이 대체로 그럴 텐데, 강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불비례적으로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갑’들에게 ‘심정적으로나마’ 유죄 추정의 원칙을 좀 들이대기로서니, ‘을’들로서는 그저 본전치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우리가 민주주의에 그리 목매는 이유도 그것이 약자들을 거드는 데 상대적으로 유용한 정치 제도이기 때문이다. 정치마저 약자를 편들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부산을 떤다 한들, 그런 정치는 이미 존재할 가치를 잃는다. 민주주의를 부단히 수선하여 대표성을 높이는 일이란, 각자가 역사와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일과 다름없을 것이다.

선거 제도는 정치 과정에서 대표성을 확보하는 핵심적인 장치다. 소선거구제가 대표성과 관련하여 치명적인 결함을 지닌다는 점은 두루 알려진 바와 같다. 물론 그런 결함이 이점이 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의원내각제하의 소선거구제를 수 세기 동안 채택해 온 영국은 이모저모의 비례대표제를 지닌 대륙 국가들과는 달리, 극우 세력의 정치적 진입을 성공적으로 봉쇄해 왔다.

그러나 한국에는 소선거구제에 우호적인 이러한 영국적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제왕적’이란 수사가 광범위하게 (부정적으로) 먹혀들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권위주의 체제의 오랜 경험과 기억은 (승자 독식 체제가 부추긴) 강한 권력에 대한 거부감을 널리 유포시켰다. 더욱이 한국에는 종교, 인종, 언어 등 정체성 정치의 토대가 될 만한 체계적 갈등 요인이 부재하거니와, 비례대표 원리가 대폭 도입된다 해도, 그것이 근본주의적 정치 세력의 발호로 이어질 확률은 별로 없다. 지역 정당들이 대거 등장할 수 있지만, 한국의 지역주의는 본래적 귀속성에 의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권에 의해 인위적으로 창출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정치가 정상화되고 빈부 문제 등 본질적 갈등이 누그러지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될 가능성이 많다.

남은 것은 소선거구제가 두 거대 보수 정당에 맞서는 건전한 진보 세력을 정치적으로 부당하게 배제함으로써 대표성을 왜곡한다는 점이다. 해법은 선거 제도에 비례성을 높이는 일일 텐데, 기득권의 비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려면, 기존 지역구 수를 건드리지 않은 채 비례대표의 지분을 늘리는 방법 외에 뾰족한 수가 없다. 영국은 남한 인구보다 불과 1300만 명 많지만 하원 의원 수는 한 세기 넘게 우리 두 배인 650명 내외에서 변함이 없다. 실은 대표성 고양과 더불어 양질의 정치인이 공급된다면, 국회의원 수가 큰 쟁점이 될 이유도 사라질 것이다.

한국 정당 체제와 정당 조직의 후진성을 탓하며 선거 제도 개혁의 시기상조를 운운한다면, 이는 한국적 현실을 들어 지방 자치를 그리 오랫동안 천연시켰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앞세워 권위주의를 정당화했던 끔찍한 과거를 다시 연상시키는 일이다. 모든 의미 있는 개혁은 불리한 여건에서 시도된 후 서서히 토양을 바꾸어 나갔다. 비례대표의 의의가 확인되고 후보자 선출 과정의 공개성과 투명성이 제고되면 새로운 스펙트럼의 정당 체제 또한 점차 자리 잡을 것이다.

좋은 선거 제도는 좋은 정치를 위한 기본 토양이다. 그동안 촛불 운운이 정략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변변한 개혁 하나 없이 지내 온 세월이었으니, 촛불 정신과 개혁은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했던 것인가. 선거 제도 개혁은 아홉을 내주더라도 기어코 관철해야 할 개혁 과제다. 정치권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합의했다니, 만시지탄이나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상극처럼 보였던 거대 양당이 지역구 예산 확보와 소선거구제 방어라는 ‘일타쌍피’를 탐해 느닷없이 ‘협업’을 감행했던 게 불과 엊그제였던 것을 떠올리면, 당장의 정치적 곤궁을 면하려는, 참으로 미덥지 못한 임기응변의 선언적 제스처일지 모른다는 의구심 또한 떨칠 수 없다. 정치마저 ‘갑질’에 나설 거라면, 애초에 민주주의는 왜 하자며 그리 법석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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