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 <124>당나라 재상 장가정
2018년 03월 20일(화) 00:00 가가
군제 개혁 앞장 … 동생 비리로 좌천
장가정(張嘉貞, 665-729)은 산서성 의지 출신으로 자는 가정이다. 현종 때 요숭, 송경에 이어 재상에 올랐다. 군제 개혁에 앞장섰으나 동생의 독직 사건에 연루돼 파직되었다.
어려서부터 시경, 서경 등 5경에 능통했다. 관직생활을 시작해 하북성 평양현위가 되었다. 702년 시어사 장순헌이 그가 특별한 재주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 주문(奏文)을 쓰게 했는데 남들이 생각지 못한 내용이 풍부했다. 측천황제에게 관직을 주도록 청해 감찰어사 직을 제수했다. 이후 병부원외랑, 중서사인을 역임했다. 산서성 태원의 병주장사로 있으면서 여러 가지 돌궐 대책을 내놓았다. 717년 “돌궐족 중 새로이 항복한 사람들은 태원 이북에 흩어져 살고 있으므로 많은 병사를 주둔케 하여 그들을 다스리도록 하십시오”라고 주청해 8만명을 모집했다. 조정은 그가 천병군대사를 겸무토록 했다. 718년 그가 군대에서 사치하고 교만하며 뇌물을 받았다는 고발이 들어왔다. 조사결과 사실무근으로 들어나자 현종은 고발자를 처벌하려 했다. 그가 주문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 만약 죄를 준다면 언로가 막히게 되어 천하의 일이 위로 보고되는 일이 없어질 것이므로 바라건대, 특별히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가 이로 말미암아 충성스럽게 생각해 중용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
720년 불량화폐인 악전(惡錢) 문제로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자 재상 송경을 파직하였다. 원건요를 수석재상으로 삼고 장가정을 차석재상으로 발탁했다. 현종은 그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지 않고 단지 북방 지역의 절도사라는 기억만 떠올랐다. 중서시랑 위항을 불러 물어보았는데 삭방절도사 장제구의 이름이 나오자 그를 임명하는 조서를 쓰도록 했다. 위항이 물러난 후 대신들의 소장을 열람하던 중 장가정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위항을 불러 임명조서를 다시 쓰도록 하명했다고 한다. 원건요는 원만한 성품의 인물인 반면 장가정은 단호하고 추진력이 강했다. 자연스럽게 그가 내각을 주도하는 형식이 되었다. 묘연사, 여태일, 최훈, 원가정 등 네 명의 부하를 크게 신임해 조정에서는 이를 ‘네 명의 아들’이라고 흉보았다. 722년 광주도독 배주선의 죄를 놓고 중신들이 대립하였다. 그는 장형(杖刑)을 줄 것을 요청했다. 장열이 이에 반대하며 주장하기를 “신이 듣건데 형별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건은 황제와 가까이 있으므로 염치를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대부를 죽일 수는 있지만 치욕을 줄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장열의 말을 따름에 따라 둘 사이에 앙금이 남게 되었다.
그는 문제가 누적된 군역제도(軍役制度) 개혁에 나섰다. 당나라는 부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농사에 종사하다가 부르면 군에 가서 봉사하는 방식이었다. 21세에서 60세까지가 모집 대상으로 종신제에 가까웠다. 장군과 장교들이 군인들을 자기집 하인처럼 취급해 가사 일을 시키고 봉록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원성이 자자했다. 그는 복무기간을 25세에서 50세로 단축해 백성들이 교대로 군대에 복무토록 개선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이 크게 줄었다.
723년 동생 금오장군 장가우의 뇌물수수 사건에 연루돼 파직되고 유주자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호부상서 익주장사 공부상서 직을 역임한 후 729년 세상을 떠났다. 견사지행(牽絲之幸)이라는 고사가 있다. 관리 곽원진이 그의 신망을 받아 자신의 딸 다섯을 각기 실을 잡고 늘어서도록 한 연후 하나를 잡아 당겨 셋째 딸과 혼인하게 했다는 일화다.
그는 평소 재물에 관심이 적었다. 누가 그에게 농지와 택지를 사도록 권유하자, 그가 말하기를 “내가 장상이 되었는데, 어찌 춥고 배고픈 것을 걱정하겠는가? 만약 그러다가 죄를 짓는다면 비록 땅과 집이 있더라도 쓸 곳이 없다. 관리들이 좋은 농지를 넓게 차지하는 것을 보면서, 죽으면 무뢰한 자식들이 술 먹고 여색에 빠지는 밑천이 될 뿐으로 갖지 않는 것이다.” 요숭은 조정에 능했고 송경은 법률에 소상했으며 장열은 문치에 뛰어났다. 그는 관리에 출중한 재상으로 평가받았다.
어려서부터 시경, 서경 등 5경에 능통했다. 관직생활을 시작해 하북성 평양현위가 되었다. 702년 시어사 장순헌이 그가 특별한 재주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 주문(奏文)을 쓰게 했는데 남들이 생각지 못한 내용이 풍부했다. 측천황제에게 관직을 주도록 청해 감찰어사 직을 제수했다. 이후 병부원외랑, 중서사인을 역임했다. 산서성 태원의 병주장사로 있으면서 여러 가지 돌궐 대책을 내놓았다. 717년 “돌궐족 중 새로이 항복한 사람들은 태원 이북에 흩어져 살고 있으므로 많은 병사를 주둔케 하여 그들을 다스리도록 하십시오”라고 주청해 8만명을 모집했다. 조정은 그가 천병군대사를 겸무토록 했다. 718년 그가 군대에서 사치하고 교만하며 뇌물을 받았다는 고발이 들어왔다. 조사결과 사실무근으로 들어나자 현종은 고발자를 처벌하려 했다. 그가 주문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 만약 죄를 준다면 언로가 막히게 되어 천하의 일이 위로 보고되는 일이 없어질 것이므로 바라건대, 특별히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가 이로 말미암아 충성스럽게 생각해 중용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
723년 동생 금오장군 장가우의 뇌물수수 사건에 연루돼 파직되고 유주자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호부상서 익주장사 공부상서 직을 역임한 후 729년 세상을 떠났다. 견사지행(牽絲之幸)이라는 고사가 있다. 관리 곽원진이 그의 신망을 받아 자신의 딸 다섯을 각기 실을 잡고 늘어서도록 한 연후 하나를 잡아 당겨 셋째 딸과 혼인하게 했다는 일화다.
그는 평소 재물에 관심이 적었다. 누가 그에게 농지와 택지를 사도록 권유하자, 그가 말하기를 “내가 장상이 되었는데, 어찌 춥고 배고픈 것을 걱정하겠는가? 만약 그러다가 죄를 짓는다면 비록 땅과 집이 있더라도 쓸 곳이 없다. 관리들이 좋은 농지를 넓게 차지하는 것을 보면서, 죽으면 무뢰한 자식들이 술 먹고 여색에 빠지는 밑천이 될 뿐으로 갖지 않는 것이다.” 요숭은 조정에 능했고 송경은 법률에 소상했으며 장열은 문치에 뛰어났다. 그는 관리에 출중한 재상으로 평가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