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 <98> 태종의 인척 고사렴
2017년 09월 05일(화) 00:00 가가
지방 제도·귀족 서열 정비
고사렴(高士廉, 575-647)은 발해 수현 출신으로 자는 사렴이다. 북제 청하왕 고악의 손자다. 당태종 정관치세에 기여한 공으로 능연각 24인으로 선정되었다.
젊어서부터 문학과 역사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력이 뛰어났다고 평가받았다. 누이가 돌궐 정책을 총괄한 장손성에게 시집가 그의 자손인 태종비 장손황후, 장손무기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복형제인 장손안업은 동생인 장손황후와 장손무기를 심하게 구박했다. 그는 질녀인 장손황후를 직접 보살펴 이세민에게 출가시켰다. 수나라에서 치예랑, 주연주부, 교지태수를 지냈고 622년 당 고조 이연에게 귀순했다. 이후 진왕 이세민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황태자 건성파와 세민파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이 한편이 되어 세민을 압박했다. 두건덕, 왕세충을 물리친 공으로 세민이 천책상장(天策上將)이 되자 양측의 대립은 도를 넘어섰다. 나날이 커가는 세민의 위세에 위협을 느낀 태자파가 현무문에서 세민을 치려했지만 역습을 당해 건성과 원길이 죽임을 당했다. 현무문의 정변으로 세민이 권력을 잡았다. 이세민은 “형제간에 서로 해치는 것은 고금에서 가장 큰 죄악이다”며 싸움을 극력 피했으나 심복인 장손무기, 고사렴, 위지경덕 등이 밤낮으로 태자파를 공격할 것을 주청했던 것이다.
황제로 취임한 세민은 고사렴을 우서자로 삼았다. 이어 시중으로 삼았다. 태종 초기 동돌궐과의 국경 분쟁이 심화되었다. 돌궐의 힐리가한이 백만의 군사를 이끌고 위수까지 침공했다. 태종은 직접 현무문을 나서 고사렴, 방현령 등과 말을 타고 위수로 나가서 힐리가한에게 약속을 어긴 것을 크게 책망했다. 힐리가한은 당의 군용이 매우 강성한 것을 보고 겁이나 싸움을 그만두고 철병했다. 정관 원년(627년)에는 호북성 안륙시에 해당하는 안주 대도독이 되었다. 익주대도독부장사가 되어 촉 지방의 행정을 담당했다. 제도를 고치고 풍속을 바로잡아 당의 통치가 아래까지 미치도록 세심히 배려했다. 관개시설을 정비해 장마 등으로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 좋은 평판을 얻었다. 이부상서가 되어서는 위징, 잠문본, 영호덕분 등과 함께 대당씨족지(大唐氏族志)를 편찬하였다. 이로서 당나라 귀족과 문벌 등의 서열과 위계가 분명히 정해졌다. 293개의 성에 1651개의 집안이 포함되었다. 우복야가 되었고 허국공에 봉해졌다.
642년 장손무기, 방현령, 두여회, 위징 등과 함께 능연각 24인의 한명으로 선정되었다. 643년에는 우복야를 그만두고 동문하중서삼품으로 정사에 계속 참여하였다. 태종은 중신들의 인물평을 하면서 “옛날과 지금의 일들을 섭렵하고 있고, 심술(心術)이 분명하게 통달해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도 절개를 고치지 아니하며 관직을 가지고서도 분당을 만들지 아니하지만 부족한 것을 뼈있게 간언한다“며 고사렴의 학문과 기개를 크게 칭찬하였다.
645년 태종이 영류왕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치기 위해 요동 정벌에 나섰다. 개부의동삼사인 고사렴에게 태자태부의 업무를 총괄해 기밀업무와 함께 새롭게 황태자가 된 진왕 이치를 보필토록 하였다. 진왕이 고사렴에게 집무할 수 있는 책상을 만들어 하사했지만 굳게 사양했다. 그의 인품이 이토록 강직하고 겸손했다. 647년 정월 그의 병이 위중해 태종이 문병했는데 며칠 후 세상을 하직했다. 병에서 쾌유한지 얼마되지 않은 태종이 장례식에 가려하자 방현령이 이를 말렸다. 태종은 “고공은 다만 임금과 신하일 뿐만 아니라 옛날 친구이고 인척인데 어찌하여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곡을 하지 않을 수가 있소.”라며 시신들을 인솔해 흥인문으로 나아갔다. 황상의 건강을 우려한 장손무기가 눈물을 흘리며 반대하자 궁으로 돌아와 곡을 하였는데 눈물이 마치 비오는 것처럼 흘러내렸다고 한다. 영구가 산소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서북루에 올라 통곡하였다. 이처럼 태종과 고사렴의 관계는 깊고도 깊었다. 태종시대를 위대한 군신 관계의 시대라고 후세 사가들이 칭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고사렴은 황제의 신임을 한껏 받은 복 많은 신하였다.
젊어서부터 문학과 역사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력이 뛰어났다고 평가받았다. 누이가 돌궐 정책을 총괄한 장손성에게 시집가 그의 자손인 태종비 장손황후, 장손무기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복형제인 장손안업은 동생인 장손황후와 장손무기를 심하게 구박했다. 그는 질녀인 장손황후를 직접 보살펴 이세민에게 출가시켰다. 수나라에서 치예랑, 주연주부, 교지태수를 지냈고 622년 당 고조 이연에게 귀순했다. 이후 진왕 이세민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황태자 건성파와 세민파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이 한편이 되어 세민을 압박했다. 두건덕, 왕세충을 물리친 공으로 세민이 천책상장(天策上將)이 되자 양측의 대립은 도를 넘어섰다. 나날이 커가는 세민의 위세에 위협을 느낀 태자파가 현무문에서 세민을 치려했지만 역습을 당해 건성과 원길이 죽임을 당했다. 현무문의 정변으로 세민이 권력을 잡았다. 이세민은 “형제간에 서로 해치는 것은 고금에서 가장 큰 죄악이다”며 싸움을 극력 피했으나 심복인 장손무기, 고사렴, 위지경덕 등이 밤낮으로 태자파를 공격할 것을 주청했던 것이다.
645년 태종이 영류왕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치기 위해 요동 정벌에 나섰다. 개부의동삼사인 고사렴에게 태자태부의 업무를 총괄해 기밀업무와 함께 새롭게 황태자가 된 진왕 이치를 보필토록 하였다. 진왕이 고사렴에게 집무할 수 있는 책상을 만들어 하사했지만 굳게 사양했다. 그의 인품이 이토록 강직하고 겸손했다. 647년 정월 그의 병이 위중해 태종이 문병했는데 며칠 후 세상을 하직했다. 병에서 쾌유한지 얼마되지 않은 태종이 장례식에 가려하자 방현령이 이를 말렸다. 태종은 “고공은 다만 임금과 신하일 뿐만 아니라 옛날 친구이고 인척인데 어찌하여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곡을 하지 않을 수가 있소.”라며 시신들을 인솔해 흥인문으로 나아갔다. 황상의 건강을 우려한 장손무기가 눈물을 흘리며 반대하자 궁으로 돌아와 곡을 하였는데 눈물이 마치 비오는 것처럼 흘러내렸다고 한다. 영구가 산소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서북루에 올라 통곡하였다. 이처럼 태종과 고사렴의 관계는 깊고도 깊었다. 태종시대를 위대한 군신 관계의 시대라고 후세 사가들이 칭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고사렴은 황제의 신임을 한껏 받은 복 많은 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