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남지 제7부-전통 정원과 건축] ② 지역문인들의 글숲, 탐진강변 8亭
2017년 08월 22일(화) 00:00
풍류·시국 논하던 선비들의 글터, 강바람만 하염없이

동백정, 용호정, 사인정, 창랑정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탐진강은 장흥 가지산과 영암 궁성산 골골 물이 합류하며 장흥 3개 읍면을 거쳐 강진포구로 흘러든다. 강변을 따라 불과 50여리 사이에 창랑정(滄浪亭)을 비롯하여 동백정(冬栢亭), 사인정(舍人亭), 부춘정(富春亭), 독취정(獨醉亭), 용호정(龍湖亭), 경호정(鏡湖亭), 영귀정(詠歸亭) 등 8개의 정자가 아름다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지역문인들의 붓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8정은 하나같이 장흥 문인들의 멋진 글터였던 셈이다. 장흥이 문림(文林)이라는 정체를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탐진강변 누정의 역사는 선초부터 시작된다. 1422년 읍성을 처음 건립할 때 강이 내려다보이는 객관 북쪽에 청화루가 들어선다. 의정부좌찬성 김린(金麟, 1392∼1474)은 계유정난을 피해 호계마을에 세거하고, 사인(舍人) 김필(金王筆, 1426∼1470) 역시 이때 벼슬을 버리고 장흥과 강진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설암산으로 들어와 버린다. 이곳에 각각 동백정과 사인정이 세워진다. 임란의병 문희개(文希凱, 1550∼1610)가 만년에 놀던 부춘에는 김기성(金基成, 1801∼1869)이 1838년에 세운 부춘정이 있다. 사인정 동쪽 5리쯤 떨어진 독실에는 독취정이 있다. 향촌 문인 염석진(廉錫珍, 1855∼1932)에 의하면,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 등이 정자에서 시주를 즐기고 조대에서 낚시하며 놀았다 한다. 용호정은 탐진강 중류 용반마을 용소 위에 있다. 최규문(崔奎文, 1784∼1854)이 효심이 지극한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건립했다. 경호정은 탐진강 기동마을에 있다. 운암(雲巖) 위덕관(魏德寬, 1547∼1628)이 소요하던 석대 위에 후손 위계훈(魏啓勳, 1866∼1942)이 개축했다. 영귀정은 지금은 수몰이 되어버린 옛 단산 봉명산 자락에 위계민(魏啓玟, 1858∼1925)이 1923년에 세웠다.

탐진강변 8정은 청화루를 제외하면 모두가 사가(私家) 누정들이다. 사인정은 영광김씨, 독취정은 경주김씨, 부춘정은 청풍김씨, 경호정과 영귀정은 장흥위씨, 동백정은 청주김씨, 용호정은 낭주최씨가 주인이었다. 관가 부속시설이었던 청화루도 나중에는 해평길씨의 누정 창랑정이 된다. 8정은 씨족 후손들에 의하여 재실 혹은 종회 장소로 쓰인 것이다.

그러나 8정은 18세기 이후에는 오히려 지역사회의 문학적 연계망으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 여러 문인들이 둘러 앉아 시를 읊던 시회로써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다. 지금까지 알 수 있는 8정과 관련된 시회로는 난정회(蘭亭會)·풍영계(諷詠契)·상영계(觴詠契)·정사계(亭?契)·향사회(香社會)·낙양회(洛陽會)·죽계회(竹溪會)·양사계(養士契)·강친계(降親契) 등이 있다.

이권전(李權銓, 1805∼1887)의 ‘독우재집유고’에 실린 ‘속난정회(續蘭亭會)’에는 20여 회원들이 동백정에 빙 둘러앉아 작시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조선말기 학자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이 신안 유배에서 풀려나 부춘정에 들렀을 때 100여 명이 화운하던 모습을 보고 그들과 함께 갱가수창하며 즐겁게 보냈다는 ‘부춘정후기’도 편액에 새겨져 있다. 수많은 문인들이 참여한 시회의 모습은, 이밖에 이인근(李寅根, 1883∼1949)의 ‘소천유고’, 이희석(李僖錫, 1804∼1889)의 ‘남파선생집’, 김진규(金珍圭, 1894∼1962)의 ‘만천시고’, 이수하(李洙夏, 1861∼1931)의 ‘금계집’, 염석진의 ‘남곡유고’ 등에서도 볼 수 있다. 8정을 순회하며 수창했던 시회는 상당한 집단이 존재했고, 여기에 참여한 문인 또한 문림(文林)을 형성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누정은 문인들에게 유유자적한 공간으로 인식된다. 탐진강변 8정 또한 그러한 공간이었다. 우선 정자의 이름에서부터 그렇다. ‘맹자’의 탁영탁족(濯纓濯足)에서 연유한 창랑, 중국의 은자 엄자릉(BC 39∼BC 4)이 숨어 살았던 동강 위의 부춘과 용호, 담담하게 세상을 잊고 산 하지장(659∼744)의 경호, 공자의 제자 증점의 영귀 등이 다 그러한 곳이다.

그래서일까? 8정과 관련된 수많은 시편들은 한결같이 조선후기 유행했던 실경산수화 화풍과 같은 느낌이다. 8정은 지역문인들의 유거와 은일의 글터였기에 이러한 시적 구현은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적 세계를 지배한 유교의 사유 방식 연장선상에서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흥은 동백정, 사인정 주인의 의로운 정신이 깃든 의향이기도 하다. 국가의 폐정, 관리의 부정, 백성들의 참상이 적나라했던 18∼19세기, 장흥 방촌에서 사회개선론을 주창했던 위백규(魏伯珪, 1727∼1798)는 현실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시를 썼다. 일부 양반이나 지식인들은 민란에도 가담했다. 동학농민전쟁 때는 사인정, 독취정, 창랑정과 가까운 석대들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뒤이은 일제강점기에 민중들은 결연히 일어섰다.

이러한 시기에, 8정 출입 문인들의 편액은 진경산수화 같은 풍영이 대부분이다. 강변 누정이라는 문학 생태 때문이다. 편액에 저항적 경향을 내포한 사회시나 풍유시가 없다 해서 위와 같은 현실을 외면했다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무저항적 저항이라는 피세(避世)의 역설(逆說)로 이해해야 되지 않을까? 또 개인의 문집을 샅샅이 뒤지다 보면 위와 같은 경향은 분명히 반전이 있을 것이다.

지금, 탐진강변 8정은 세월의 강바람을 하염없이 맞고 있다. 문림들의 시편들이 시대의 된바람을 간신히 견디고 있다. 지역문화의 정체가 멸실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옛 문인들의 글터였던 8정이 지역이 자랑스러워하는 글숲으로 되살아 날 수는 없을까?



* 김준옥 전남대 문화콘텐츠학부 교수

-한국가사문학 진흥위원회 위원

-한국시가문화학회 평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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