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서] 4. 베니스 야경서 유럽의 흑진주 코토르까지
2017년 06월 01일(목) 00:00 가가
잦은 외침에 시달린 ‘유럽의 흑진주’ 평온하기만 하다
베니스와 작별하는 날이다. 베니스를 왔을 때처럼 비가 다시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유리공예로 소문난 무라노 섬으로 갈 계획을 접는다. 베니스를 떠나며 가장 아쉬운 것은 미술관을 들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학 입학 전까지 미술학도였던 나로서는 카 페사로 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칸딘스키와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싶었는데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고등학교시절 미술반에서 비록 화집이었지만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고는 그가 구사한 색채에서 음악적인 선율을, 마티스 그림에서는 선혈 같은 자극적인 강렬함을 느끼면서 몹시 부러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구겐하임 미술관에 들러 형태를 해체해버린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하지 못한 것도 불운이란 생각이 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베니스를 또 오게 된다면 그때는 미술관부터 먼저 들를 것이라고 다짐해 본다.
일행은 크루즈 터미널로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선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크루즈터미널까지의 택시 요금은 35유로. 우리 돈으로 4만3000여 원 정도이다. 우리가 탈 배는 로열 캐리비언 회사의 비전 호. 승객 2000여 명과 승무원 700 명이 승선하는 8만 t의 거대한 배라고 한다.
택시는 산타루치아역을 지나 크루즈터미널까지 들어가 준다. 그런데 크루즈 승선 수속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까다롭다.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영문설문지 등을 작성한 뒤 가까스로 배에 오른다. 배는 거대한 호텔 같다. 배는 10층까지 있고, 일행에게 배당된 방은 주로 6층이다. 방도 오늘 아침까지 머물렀던 호텔과 엇비슷한 구조다. 삼성 상표가 붙은 TV가 눈길을 끈다. 미국국적 회사의 배에 객실마다 설치돼 있다는 것이 국력의 상징처럼 보여 어깨가 으쓱해진다.
방에만 있기가 답답해 은사 홍기삼 선생님을 모시고 10층으로 올라가 본다. 애연가인 은사를 위해 흡연이 허용된 장소로 가서 마주앉는다. 대학 후배인 길진현, 권수구 동문도 좌청룡 우백호인 듯 은사 옆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눈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인지 신문에서 보았던 베니스 주민들의 선상시위는 안 보인다. 정박한 크루즈 주위로 배를 타고 와서 ‘관광객은 꺼져라’ ‘당신은 지금 이곳을 파괴하고 있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한다는 기사를 보았던 것이다. 한 해 동안 베니스를 찾는 관광객이 2000만 명이라고 하니 오버투어리즘(Over_Tourism)의 폐해, 즉 과도한 관광객으로 인해서 주민들 삶의 질이 나빠지고 있다는 기사에 ‘나도 피해를 주었나?’ 하고 자격지심이 든다. 내게 바람이 있다면 현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공정여행(公正旅行)이 정착되기를 바랄 뿐이다.
크루즈가 그리스를 향해 출발하는 시각은 저녁식사 이후라고 한다. 배는 베니스의 야경을 뒤로 한 채 캄캄한 아드리아 해를 밤새 항해할 터. 아드리아 해는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사이에 있는 마치 목구멍처럼 길쭉하게 생긴 바다이다. 이 바다를 지나야만 이오니아 해, 에게 해, 흑해를 만날 수 있다.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홀연히 날빛은 사라지고 밤이 베니스를 접수해버린다. 그러나 베니스의 불빛들은 어둠을 먹이로 삼는 화려한 야광의 생명체 같다. 낮에 보았던 궁전, 성당, 교회 등이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유혹하고 있다. 베니스가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베니스 사람들은 밤을 예우할 줄 아는 낭만주의자들인 듯하다. 밤의 시간과 공간이 잠만 자라고 존재한다면 인간 세상은 또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삭막할까.
나는 역사적 사실을 하나 발견하고서는 스스로 놀란다. 배가 항해하고 있는 바닷길은 십자군의 동방원정 루트와 같다. 베네치아가 동방에 눈을 돌리고 뻗어나간 바닷길과 일치하고 있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바다와 결혼해 풍요를 누렸던 것은 수사나 과장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실제로 그들은 남녀가 하객 앞에서 서약하는 것처럼 바다와 결혼하는 의식을 치렀다. 최고지도자인 도제가 수많은 베네치아 사람들 앞에서 바다에 반지를 던지는 의식을 행했던 것이다.
내일 아침에 배가 도착하는 코토르도 한때 베네치아 식민지였다고 한다. 4차 십자군이 아드리아 해를 지나면서 가장 먼저 공격해 점령했던 도시는 발칸반도 해변의 도시 자라였다. 기독교도가 사는 자라를 침략하지 말라고 교황이 명을 내렸지만 베네치아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자라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다. 십자군은 명을 어기면 파문의 족쇄를 채우겠다고 경고한 교황보다는 자신들의 병참을 후원해 준 베네치아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베네치아에게 갚아야 할 엄청난 채무 때문이었다. 십자군 수천 명이 자라 항구에 하선한 뒤 공격무기들을 배치하자 자라는 이틀 만에 손을 들었다. 결국 자라는 함락됐고, 십자군을 모병한 영주들은 약탈품을 독차지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자라 선원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동방원정으로 성지를 탈환하려는 십자군의 목적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라의 함락은 영주들과 베네치아 사람들의 잔치일 뿐이었다. 십자군 내부에서 분노가 폭발했다. 베네치아 군사와 십자군이 충돌했다. 자라 시가지에서 칼, 장창, 석궁 등으로 무장한 채 싸움을 벌였다. 다행히 지휘관들에 의해 상황은 곧 통제됐지만 성지순례를 하겠다고 고향을 떠나온 십자군의 불만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베네치아 군사가 자라에 이어 두 번째로 공격할 도시는 몬테네그로의 해변도시 코토르. 몬테네그로는 제주도만 한 면적의 작은 나라인데 바이런이 ‘육지와 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노래했던 검은 산의 땅. 그래서인지 유럽 사람들은 ‘유럽의 흑진주’라고 불렀다. 그러나 외침이 잦았던 몬테네그로의 운명은 몹시 기구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곽도시 코토르의 역사는 기원전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름은 아크루비움이었다. 4세기부터는 비잔틴 제국, 14세기에는 베네치아공화국, 이후 오스만튀르크, 합스부르크 왕국, 나폴레옹이 통치한 이탈리아 공화국 등이 차례로 지배했다. 발칸반도로 상륙하려는 해양세력과 반도를 지키려는 육지세력이 접전할 수밖에 없었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이었으리라. 현재의 코토르 성곽과 요새는 베네치아가 통치할 때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을 대비해 축성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런 이유로 코토르가 ‘발칸의 베네치아’라고 불린다니 피지배자에게는 오래된 상흔이다.
배가 심하게 움직였는지 가수면 상태로 하룻밤을 보낸 것 같다. 멀미는 아니지만 머리가 무겁다. 커튼을 젖히니 배는 잔뜩 흐린 새벽바다를 달리고 있다. 창에 날벌레처럼 빗방울들이 달라붙었다가 사라지곤 한다. 코토르 만도 비가 내리고 있는 모양이다. 큰 파도가 악마의 미소를 보내고 있다. 솟구치는 파도의 흰 이빨이 위협적이다. 파고 탓에 배는 코토르 선착장까지 접안이 안 되는 것 같다. 크루즈 옆구리에 달린 소형 보트들을 이용해 승객을 이동시킨다고 한다. 일행은 본부에서 지시하는 대로 승선할 소형 보트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그러나 바다에 소형 보트를 띄우지 못한다. 잠시 후 안내방송을 들어보니 파도가 거칠어 위험하단다. 한 나절을 기다렸지만 하선은 불가능하다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배는 파도가 접안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배의 뒷모습을 보고 파도가 히죽히죽 웃고 있는 듯하다.
길진현 동문의 코토르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코토르는 곰솔나무가 자생하는 검은 타라 산맥의 빙하협곡에 바닷물이 들어차 생긴 피요르드 해안의 성곽도시라고 한다. 성곽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조형물은 오루치아 광장에 우뚝 솟은 시계탑이라는데, 19세기 초 코토르를 점령한 나폴레옹이 자신의 치세를 과시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이밖에도 로마 가톨릭과 세르비아 정교회를 포함한 9개의 교회, 5개의 수도원, 귀족들의 궁, 병원, 극장, 도서관 등의 건물이 있는데 길 동문의 설명에 따르면 발칸반도 해변의 두브로브니크와 쌍벽을 이룰 만큼 중세의 고풍을 간직한 곳이 코토르라고 설명한다. 길 동문의 코토르 예찬은 끝이 없다. 실제로 그가 코토르 고성 언덕에서 찍었던 사진 한 장이 일행 모두의 입을 다물어버리게 한다.
크루즈가 그리스를 향해 출발하는 시각은 저녁식사 이후라고 한다. 배는 베니스의 야경을 뒤로 한 채 캄캄한 아드리아 해를 밤새 항해할 터. 아드리아 해는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사이에 있는 마치 목구멍처럼 길쭉하게 생긴 바다이다. 이 바다를 지나야만 이오니아 해, 에게 해, 흑해를 만날 수 있다.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홀연히 날빛은 사라지고 밤이 베니스를 접수해버린다. 그러나 베니스의 불빛들은 어둠을 먹이로 삼는 화려한 야광의 생명체 같다. 낮에 보았던 궁전, 성당, 교회 등이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유혹하고 있다. 베니스가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베니스 사람들은 밤을 예우할 줄 아는 낭만주의자들인 듯하다. 밤의 시간과 공간이 잠만 자라고 존재한다면 인간 세상은 또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삭막할까.
나는 역사적 사실을 하나 발견하고서는 스스로 놀란다. 배가 항해하고 있는 바닷길은 십자군의 동방원정 루트와 같다. 베네치아가 동방에 눈을 돌리고 뻗어나간 바닷길과 일치하고 있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바다와 결혼해 풍요를 누렸던 것은 수사나 과장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실제로 그들은 남녀가 하객 앞에서 서약하는 것처럼 바다와 결혼하는 의식을 치렀다. 최고지도자인 도제가 수많은 베네치아 사람들 앞에서 바다에 반지를 던지는 의식을 행했던 것이다.
내일 아침에 배가 도착하는 코토르도 한때 베네치아 식민지였다고 한다. 4차 십자군이 아드리아 해를 지나면서 가장 먼저 공격해 점령했던 도시는 발칸반도 해변의 도시 자라였다. 기독교도가 사는 자라를 침략하지 말라고 교황이 명을 내렸지만 베네치아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자라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다. 십자군은 명을 어기면 파문의 족쇄를 채우겠다고 경고한 교황보다는 자신들의 병참을 후원해 준 베네치아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베네치아에게 갚아야 할 엄청난 채무 때문이었다. 십자군 수천 명이 자라 항구에 하선한 뒤 공격무기들을 배치하자 자라는 이틀 만에 손을 들었다. 결국 자라는 함락됐고, 십자군을 모병한 영주들은 약탈품을 독차지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자라 선원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동방원정으로 성지를 탈환하려는 십자군의 목적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라의 함락은 영주들과 베네치아 사람들의 잔치일 뿐이었다. 십자군 내부에서 분노가 폭발했다. 베네치아 군사와 십자군이 충돌했다. 자라 시가지에서 칼, 장창, 석궁 등으로 무장한 채 싸움을 벌였다. 다행히 지휘관들에 의해 상황은 곧 통제됐지만 성지순례를 하겠다고 고향을 떠나온 십자군의 불만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베네치아 군사가 자라에 이어 두 번째로 공격할 도시는 몬테네그로의 해변도시 코토르. 몬테네그로는 제주도만 한 면적의 작은 나라인데 바이런이 ‘육지와 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노래했던 검은 산의 땅. 그래서인지 유럽 사람들은 ‘유럽의 흑진주’라고 불렀다. 그러나 외침이 잦았던 몬테네그로의 운명은 몹시 기구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곽도시 코토르의 역사는 기원전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름은 아크루비움이었다. 4세기부터는 비잔틴 제국, 14세기에는 베네치아공화국, 이후 오스만튀르크, 합스부르크 왕국, 나폴레옹이 통치한 이탈리아 공화국 등이 차례로 지배했다. 발칸반도로 상륙하려는 해양세력과 반도를 지키려는 육지세력이 접전할 수밖에 없었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이었으리라. 현재의 코토르 성곽과 요새는 베네치아가 통치할 때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을 대비해 축성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런 이유로 코토르가 ‘발칸의 베네치아’라고 불린다니 피지배자에게는 오래된 상흔이다.
배가 심하게 움직였는지 가수면 상태로 하룻밤을 보낸 것 같다. 멀미는 아니지만 머리가 무겁다. 커튼을 젖히니 배는 잔뜩 흐린 새벽바다를 달리고 있다. 창에 날벌레처럼 빗방울들이 달라붙었다가 사라지곤 한다. 코토르 만도 비가 내리고 있는 모양이다. 큰 파도가 악마의 미소를 보내고 있다. 솟구치는 파도의 흰 이빨이 위협적이다. 파고 탓에 배는 코토르 선착장까지 접안이 안 되는 것 같다. 크루즈 옆구리에 달린 소형 보트들을 이용해 승객을 이동시킨다고 한다. 일행은 본부에서 지시하는 대로 승선할 소형 보트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그러나 바다에 소형 보트를 띄우지 못한다. 잠시 후 안내방송을 들어보니 파도가 거칠어 위험하단다. 한 나절을 기다렸지만 하선은 불가능하다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배는 파도가 접안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배의 뒷모습을 보고 파도가 히죽히죽 웃고 있는 듯하다.
길진현 동문의 코토르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코토르는 곰솔나무가 자생하는 검은 타라 산맥의 빙하협곡에 바닷물이 들어차 생긴 피요르드 해안의 성곽도시라고 한다. 성곽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조형물은 오루치아 광장에 우뚝 솟은 시계탑이라는데, 19세기 초 코토르를 점령한 나폴레옹이 자신의 치세를 과시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이밖에도 로마 가톨릭과 세르비아 정교회를 포함한 9개의 교회, 5개의 수도원, 귀족들의 궁, 병원, 극장, 도서관 등의 건물이 있는데 길 동문의 설명에 따르면 발칸반도 해변의 두브로브니크와 쌍벽을 이룰 만큼 중세의 고풍을 간직한 곳이 코토르라고 설명한다. 길 동문의 코토르 예찬은 끝이 없다. 실제로 그가 코토르 고성 언덕에서 찍었던 사진 한 장이 일행 모두의 입을 다물어버리게 한다.